매일신문

삶-386 농사꾼 송성일씨

송성일(41)씨는 몇해전 무작정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찾아든 귀농인이다. 대도시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하고 고추농사를 짓는 농부로 과감하게 변신했다. 구릿빛 얼굴에 소탈한 웃음, 그의 건강한 모습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한 젊은이의 보람찬 하루가 펼쳐진다.

경북 봉화군 명호면 풍호1리. 속칭 비나리에서 고추농사를 짓는 386세대 송씨는 서울대 철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엘리트다. 잠시 대기업에서 근무했고,출판사도 경영했지만 틀에 박힌 직장생활이 그는 마뜩찮았다. 더욱이 개인사업을 할 능력도 없어 늘 새로운 길에 대해 고민했다. 결국 그가 결심한 길은 귀농(歸農).

1997년 가을의 일이다. 서울의 위성도시 광명에서 살던 송씨가 혼자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처음 도착한 곳은 강원도였다. 6세까지 강원도 춘천 근교 오음리에서 산 기억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강원도는 농사짓기에 조건이 맞지 않았다.넉넉지 못한 송씨에게 땅값이 너무 비싼 것이 흠이었다. 발길을 돌려 경북 북부지방으로 내려온 그에게 산자수명한 청량산이 눈에 들어왔다.마침 고추 수확철이었다. 우선 빈 집에 짐을 풀고 품팔이부터 시작했다.

농사 경험이 전혀 없는 그로서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하루 일당 2만1천원.허리 한번 펴지 못할 정도의 고통스러운 중노동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피해 다니는 수배자가 아닌가하는 의심이 눈초리가 느껴졌다."왜 왔니껴?" "농사 배울라꼬예" "농사 아무나 짓니껴?"…. 시작은 그랬다.

어깨너머로 조금씩 농사일을 익힌 그는 이듬해 자기 농사를 시작했다. 밭 5천평을 빌려 수박과 참깨, 양파, 감자, 호박 등을 심었다. 고추 품을 팔때 너무고생한 탓에 고추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직거래 할 수 있는 유일한 품목이라 여벌로 1천평 가까이 고추도 심었다. 몸 하나 믿고 겁없이 덤벼든 농사지만 그에겐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씩 송씨는 농부가 되어갔다.

"서울 생활이 싫어서 귀농한 것도 아니고, 자연주의자도 아닙니다. 쳇바퀴 돌듯 시간에 얽매여 무기력하게 살기보다 비록 힘들지만 마음껏 시간적 자유도 누리고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 농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혼후 10년동안 10번이나 이사할 정도로 도시 생활은 송씨에게 무력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도시생활에 몸도 마음도 지친 그가 귀농을 결심했을 때 서양화가인부인 류준화(40)씨는 몇가지 단서를 달았지만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1년여의 단독 귀농이 어설프지만 조금씩 자리가 잡혀나가자 부인과 딸 송화(12·명호초등5)가합류했다. 99년초 양지바른 곳에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마음껏 그림 그릴 수 있도록 10평 가량 아내의 작업실도 넣었다.

4년여 시간이 흘러 송씨는 이제 마을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농사꾼으로 변신했다. 2월말 고추 파종에서부터 모종 옮기고, 관리하고, 수확하고, 말리고, 농사가 끝난 밭을 치우고 정리하면 어느새 11월.

새벽에 눈뜨면 밭에 달려가기 바쁘고, 해거름 때 밭에서 돌아오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누이는 일의 연속이지만 송씨는 마음은 편하다고 말한다.

그는 50가구 100여명이 사는 비나리에서 가장 어린 농부다. 농업후계자로 선정돼 저리로 융자도 받아 온전히 밭에 투자하고 있다. 올해는 2천평 가까이 고추농사만 짓고 있다. 고추가 병충해에 약해 10회 이상 약을 뿌려야 하지만 송씨는 저농약을 고집한다. 수확은 3천근 정도. 아직 크게 돈이 되지는 않지만 뙤약볕에 구슬땀을 흘리며 고추와 씨름하고 있다.

송씨는 주로 고추농사를 짓는 풍호1리 마을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지난 겨울부터 준비한 고추직거래 인터넷 사이트(greengochu.com)도 얼마전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홈페이지에 고추에 대한 여러 정보도 싣고, 산골농부이야기와 귀농일기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올려 놓았다. 반신반의하는 주민들을 설득해가면서 새로 고추 판로를 모색하고 있는 송씨의 노력이 언제쯤 빛을 보게 될지….

함께 어울릴 친구가 없어 늘 혼자 지내는 딸 송화가 안쓰럽기도 하고, 교육여건과 문화시설 등이 턱없이 부족해 불편하기도 하지만 봉화 청량산 앞을 지나는 35번 국도변 비나리에는 386 농사꾼 송성일씨가 오늘도 고추와 씨름하며 살고 있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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