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의식속에는 붉은색에 대한 묘한 거부감이 자리잡고 있다. 단군 이래 백의(白衣)민족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있는데다 근대사의 불행한 이데올로기 전쟁은 붉은색을 아예 적(敵)의 이미지로 고정시켜놓다시피 했다.
붉은색은 멀쩡한 사람을 선동하고 마취시키고,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불온 색깔이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집단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한국인이 갖고있는 '레드 콤플렉스'는 이렇게 시작됐다.
▲콤플렉스는 좀처럼 치유되지않는 심리적인 병인(病因)이다. 잠재 의식이 사고를 지배하고있기 때문이다. 이런 만성적 '레드 콤플렉스'가 한국사회에서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다. 아니 콤플렉스가 아니라 아예 '레드 우월주의'로까지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한국 축구의 월드컵 4강 신화는 붉은색을 '국민 컬러'로 바꾸어 놓았다. 붉은색은 이제 승리의 색깔이요, 기적의 색깔이 된 것이다. 붉은 색깔의 무언가를 걸치지 않으면 마치 사회 구성원에서 이탈된 느낌마저 든다.
▲붉은색이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약속할 것이라는 '레드 이코노미'가 고개들기 무섭게 기업들이 붉은색을 판촉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붉은색이 아니면 안된다는 '레드 마케팅'이 국내 시장을 달구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들은 붉은색상으로 디자인한 휴대전화 청소기 전기밥솥 등의 판매에 나섰다. 금기시된 가구나 의류에도 올가을에는 '레드'가 주류를 이룰 것이라며 업체들은 벌써부터 흥분하고 있다. 올 여름 유행을 푸른 계열로 예상했던 화장품 회사들도 붉은색 메이크업으로 급속히 전환하고 있다.
▲월드컵 특수상황이 빨간색 '반짝경기'를 불러오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폭발력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Be the Reds'라는 붉은 티셔츠는 이제 그 물결의 일부분일 뿐이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레드 열풍'이 최소한 몇 개월 동안은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마치 낡은 사진첩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듯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도 붉은색 제품을 보면서 당시의 환희를 되살린다면 국민의 행복지수는 배가(倍加)될 것이다.
▲붉은색 열풍은 한국 사회의 콤플렉스를 뛰어넘은 문화사적 쾌거다. 열등을 단번에 우월로 바꾸놓는 한국민의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흡인력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 사실 붉은색은 우리 민족과는 떨어질 수 없는 색이다.
비췻빛 가을 하늘을 수놓은 붉은 감, 울밑에선 봉선화, 고추장에서 잡귀를 쫓는다는 팥죽까지 선홍색은 수천년 우리 가슴에 못박혀있는 색이 아닌가. 또 있다. 만산을 물들이는 진달래. 세계 축구사를 완전 뒤집어놓은 온 국민의 함성이 어찌 한점 헛됨이 있으랴. 내년봄 진달래는 더욱 붉게 피어날 것이다.
윤주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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