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특별기고-월드컵 열풍과 대~한민국

어젯밤 서울의 상암경기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들끓게 만들었던 독일과의 대접전 끝에 우리의 국가대표 축구팀은 아깝게도 분패하고 말았다. 세계 만방의 공통언어인 축구로 일본열도를 잠시나마 평화적으로 점령(?)하고, 세계의 지축을 뒤흔들어 놓으려던 우리의 꿈은 일단 무산되었다.

반세기만에도 한번 올까말까한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 같아서 애통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번 한일공동 월드컵 대회를 통해 얻은 우리의 수확은 너무나 알차고 값지다. 차제에 우리는 그 수확을 조목별로 계산해봐야 이 허탈감을 쉬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21세기의 첫 축구제전인 2002년 월드컵대회는 그 공동 개최지가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라는 데서도 의미심장하게 드러나듯이 이변의 속출이었다. 실로 불가사의한 기적의 대행진이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FIFA 랭킹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성적순위라는 세간의 우스개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유럽의 축구 강국들을 속속 조기귀국시킨 지금까지의 전적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깎아서 말하더라도 그 이변 돌출의 최대 주인공은 단연 공동개최국인 '한국'이고 이때껏 세계 축구사의 변방이었던 '한국축구'의 우람한 부상이며, '대~한민국'과 '필승 코리아'로 대변하는 거대한 붉은 물결로서의 '한국인'이다.

비록 인류의 가장 화려한 단일제전을 통해서일 망정 '파워축구'라는 희한한 집단경기력으로 한국이, 그리고 한국인 모두의 뜨거운 열기가 이처럼 전 지구적 조명을 받을 줄이야 누군들 감히 예상했을까. 실로 감개무량한 보람을 만끽한 나날이었으며, 도대체 축구의 마력이 무엇이길래 우리 모두를 그토록 똘똘 뭉치게 만들었을까.

알다시피 축구야말로 가장 단순한 단체경기다. 사람의 동작중에서 가장 만만한 것이 손과 팔의 임의로운 놀림인데 그것만 사용하지 말라는 규칙이 그 단순성을 웅변한다. 인간의 머리로 만든 규칙치고는 너무나 순진하고 간단해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손과 팔만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이 경기규칙은 자연스럽게도 축구를 가장 격렬한 스포츠로 자리매긴다.

거의 야만적이라고 해도 좋을 이 경기의 위신과 자격은 먹이를 쫓는 맹수처럼 달려드는 쌍방 선수들의 저돌적인 공뺏기 동작마다에 드러나고 그 원시성이야말로 모든 관중을 즉각적으로 흥분시키는 관건이다.

싸움에 진 전사의 머리통을 공 대신에 차기 시작했다는 축구의 연원에서도 이 격렬한 경기의 반문명성은 그 단순성과 함께 묘한 조화를 이룬다. 더불어 골키퍼만이 손과 팔을 사용해도 좋다는 또다른 제2의 규칙은 최종적인 승리까지의 천신만고와 그 환희를 오래도록 연장해 가며 즐기려는 인간의 또다른 지혜이다.

또 다른 소득은 히딩크 감독의 용병술이다.여러 선수들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고,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들을 활수하게 부리는 그의 빼어난 전술과 조직장역할은 실상 어떤 '기본지키기'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날렵한 개인기보다는 씩씩한 체력이 먼저라는 그의 확고한 신조, 공쫓기에 무조건 부지런한 선수들만을 기린다는 그의 합리적인 편애벽, 성실성만 보여준다면 자잘한 실수쯤이야 대범하게 감싸안음으로써 선수들마다의 감투정신을 독려하는 그의 늠름한 포용력, 용사들의 지칠 줄 모르는 분발심과 단결력만이 어떤 강적이라도 무찌를 수 있다는 그의 정직한 전략 등이 그것이다.

그에게 드리운 어떤 카리스마가 사실상 이런 '기본 섬기기'에서 도출되었음을 알고 나면 그동안 여러 방면의 우리 지도자들이 그 허명무실한 통솔력으로 인간적 위엄을 얼마나 스스로 내팽개쳤는지를 새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번 월드컵대회를 통해 우리가 가장 크게 반성하고 배울 점은 바로 이 대목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또 다른 화제와 주목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붉은 물결의 '거리 응원전'이야말로 우리의 정치력이 그동안 대한민국의 진정한 정체성찾기와 그 구심점 세우기에서 얼마나 등한했나를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온갖 제도적 제재, 반민주적인 권위주의, 지나친 온정주의랄 수밖에 없는 지역 감정 따위가 우리의 진정성과 정의감과 자존심을 얼마나 제멋대로 왜곡하고, 나만 잘 살자는 이기적 파당심리를 조장해왔는지를 '거리 응원전'의 자발적 뭉침과 우레 같은 성원이 반성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을 배타적 국수주의로 읽든 민족주의의 거대한 함성으로 읽든 이번의 붉은 '거리 응원전'은 어떤 유명세의 누림과도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점에서도 일신의 영달에만 허둥거리는 기성 정치권의 무능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아야 옳다.

걸핏하면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한 '국민적 화합'을 지껄여대는 유명 정치인들에게 일침을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붉은 '거리 응원전'의 의미는 너무나 크다.

히딩크 감독의 말대로 우리는 아직도 무언가에 굶주리고 있다. 그 무엇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키는 축제이고, 그것을 이끌어낸 진정한 지도자일 것이다. 이제 대구에서 벌어질 우리 대표 축구단의 마지막 분투에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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