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창석 칼럼-해방과 도전의 축구

태극기를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태극기의 의미와 기원, 그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에, 선생님의지시에 따라 태극기를 그렸다. 하얀 도화지를 대각선으로 접고, 가운데 콤파스로 원을 돌리고, 그 안에 다시 두 개의 반원을엇갈리게 그렸다.

원 둘레에 대각선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막대기를 넣고, 드디어 설레는 마음으로 빨간 색, 파란 색 그리고 검은 색을 칠해 나가기 시작했다. 코를 닦아 터진 손으로 크레용을 잡고.... 그 때 쯤이면 교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그 많은 6·25 그림과 반공 포스터에 빨갱이를 빨갛게 그렸기 때문이었을까? 저마다 빨간 색이 모자라 빌리러 다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크레용을 낱개로 사는 아이들이 없지만, 그 때는 크레용도 낱개로, 어른들이 피우던 담배도 낱개로, 그리고그 흔한 달걀이나 사탕마저도 낱개로 팔았다. 그래서 태극기를 그리던 도중에 빨간 크레용을 사러나가곤 했다. 하여튼 우리는 그 태극기로 응원도 하고, 국가 기념일에 내걸기도 하고, 대통령이 지나가는 길목에 불려나가 흔들기도 하면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가 식민세대도 아니고 6·25 전쟁세대도 아니라 그런지 모르지만, 태극기에 감격해 가슴 뭉클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그 때 아이들은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중년이 되었고, 그들의 아들들이 드디어 태극기의 감격을 물결치게 했다. 월드컵 4강 진출! 단순히 4등을 했다기보다도 우리는 세계 열강과 어깨를 밀면서 함께 축구를 했다. 태극 전사들만 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450g의피버노바에 기꺼이 온 마음을 담아 함께 뛰었다.

사실 우리가 언제 태극기를 맘껏 흔들어 보았던가? 어디서 눈물을 머금고 태극기를 바라보았던가? 그렇다면 축구공 하나에 담은 대한국인의 불타는 열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해방이라 불리던 8·15광복절을 감격의 날로 꼽을 것이다. 모두들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서는 장면을 기억하거나 아니면 사진으로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장면은 애석하게도 일부의 의식있는 한국인, 의식있는 거리의 장면이었을 뿐, 삼천리방방곡곡의 장면도 아니요, 모든 한국인의 심정도 아니었다. 당시 소학교나 고보를 다니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에는 다른 장면도 있었다.

일왕 히로히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할 때, 수많은 학생들이 책상에 엎드려 함께 울었다는 것도 또 하나의 현장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학생들이라기보다는 일본식민 치하의 학생들로서 패망을 울었으리라. 36년 간의 식민시기란 식민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다시 식민을 낳아 기르던 긴 세월이다.

독립이란 한 번의 외침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해방에 이은 정부 수립, 정치적 내분과 전쟁 그리고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우리는 서서히세계 속에 독립을 각인하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잡은 희미한 자아 정체성의 스트레스는 한번의 "대한민국 만세"로 해소되는것이 아니다. 지난 날 일제(日帝)에 분노하면서, 일제(日製) 앞에서 사족을 못쓰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붉은 물결 위에 피버노바를 띄웠다. 나아가 붉은 물결의 신화는 대양을 넘어 세계로 파도쳐갔다. 그 전에 붉은 색은 북녘의 혁명과 일본의 정복을 상징하던 색깔이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식민과 동란을 낳은 바로 그 색깔로 해방을 확인하고싶었던 것일까? 월드컵 도중에도 빨간 T셔츠와 태극기가 모자라 온 나라가 술렁거렸다.

그러나 목적 없는 열정은 광란으로 소진되고, 의미 없는 감격은 허탈감에 빠진다. 우리의 열정에 불을 지핀 태극전사들의 뒤에는 히딩크감독이 있었다. 그는 축구에서 학연과 지연, 체면과 명령을 배제하고 기본과 능력에 충실했다.

그러기에 대한국인의 감격은 이제 보여줘야만 했던 모든 종류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는 당돌한 해방의 선언이요, 우리의 열정은 사회적으로 기본에 충실하고 개인적으로 의미있는삶을 구가하려는 당찬 도전이다.

대구가톨릭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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