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월드컵이후-(3)히딩크 신드롬

네덜란드인 거스 히딩크(Guus Hiddink)가 월드컵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을 맡는다고 했을 때 대다수 국민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젠 별 짓을 다 하는구나".

1년6개월이 지났다. 그저 월드컵 1승, 아니 좀 더 야무지게 꿈꾼다면 16강을 염원했던 국민들에게 히딩크는 4강을 선사했다.

이제 국민들은 히딩크를 열렬히 환호한다. 신드롬이 됐다.언론들은 앞다퉈 히딩크 열풍을 보도하고 그의 지도력을 분석하는 기사를 싣고 있다.

학벌과 유명세에 얽매이지 않는 선수 기용, 기본기와 기초체력 집중 훈련, 그리고 합리적인 팀 운용 등등. 모든 것이 오늘 날 한국팀이 일궈낸 쾌거의 밑바탕이 됐다.

그러나, 과연 이것 뿐일까? 히딩크였기에 가능한 과감한 시도였지만, 동시에 히딩크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시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누구나 꿰뚫을 수 있는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병폐였다. 히딩크만이 이를 간파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던 히딩크는 16강 진출이 확정된 뒤 "나는 아직도 (승리에) 굶주려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자신감이었다. 그 바탕에는 선수 개개인에 대한, 아울러 팀워크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또 그 저변엔 냉철한 분석력이 있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움에 물러섬이 없다'는 손자병법을 히딩크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감과 자만심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에서 히딩크는 외줄타기를 했다. 때론 서글프고 고독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섣부른 자만을 끝까지 경계했다.IMF 외환위기를 생각한다.

고도의 경제성장 속에 국민들은 자신감에 넘쳤다. 그러나 지나쳤다. 서투른 자신감은 자만심을 낳았다. 정부의 외환정책 실패, 외국 헤지펀드의 장난 등 '남 탓'도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한 자만의 소치였다. 우리는 쓰디쓴 좌절을 맛봤다.

그리고 정치를 생각한다. 숨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잇따라 터져나오는 '게이트' 정국에 국민들은 좌절했다. '우리가 그렇지 뭐!'하는 자조섞인 한탄이 쏟아졌다.

한달 전으로 돌아가보자. 16강을 염원했지만 마음 한 쪽에는 이웃 개최국 일본의 들러리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울한 예측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팀이 한 경기씩 치를 때마다 우리 가슴 속에는 꺼져있던 자신감이 불타올랐다. 히딩크가 호쾌한 어퍼 컷 한방을 내지를 때마다 암울하게 드리워졌던 패배주의, 권위의식이 깨뜨려졌다.

경기장에 내걸린 구호 중에 '히딩크를 대통령으로'가 있었다. 치기어린 장난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희망을 주는 지도자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심정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구호였다.

선수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땀흘리고 함께 부딪치는 히딩크의 모습을 보고 국민들은 많은 생각을 했다. 넓게 보면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이 떠올랐고, 좁게 보면 직장 상사와 부서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 가정내 가장의 모습도 겹쳐졌을 것이다.

두류공원에서 한국과 터키전을 지켜본 주부 이지은(33.대구 달서구 용산동)씨는 이렇게 말했다. "히딩크 감독이 말한 순수한 열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22명의 선수들이 어우러져 달리는 축구장 속에 우리네 삶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이제껏 잊고 지냈던 국민적 자신감을 볼 수 있어 기뻤다".

김수용기자 ks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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