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7·4공동성명 30주년

남북한 최고위급이 서로 만난 뒤 처음으로 탄생시킨 합의문서인 7·4 공동선언이 채택된 지 30주년을 맞았다.

72년 분단 4반세기만에 남북한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합의문을 만들어 낸 것 자체만으로도 흥분과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7·4 공동성명 이후 남북간에는 △불가침 합의서(1991. 12. 13)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1992. 1. 20) △6·15 정상회담 공동선언(2000. 6. 15) 등이 채택됐다.

지난 72년 7월 4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공동성명'이 동시 발표됐다.남한에서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서는 김영주 노동당조직지도부장이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공동성명에 서명, 분단 4반세기만에 처음으로 합의문서를 탄생시켰다.

모두 7개항으로 이뤄진 공동성명에는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 비방중상·무장도발 금지, 군사적 충돌 방지 대책 마련, 다방면 교류, 적십자회담 개최, 서울-평양 상설직통전화 개설 등이 담겨 있다.

양측 당국자가 최고통치권자를 대신해 공동성명에 서명한 것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당국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했음을 뜻한다.그러나 공동성명이 발표되자마자 남북간에는 이른바 '해석상의 견해차'가 드러났다.

평양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한 박성철 당시 제2부수상은 '조국통일 3대원칙'을 김일성 당시 수상의 제안에 남측이 찬성한 것이라 주장하고 즉각적인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 불신을 초래했다.

더욱이 남북 양측이 반년뒤 같은 날짜에 권력강화를 위한 개정헌법을 공표한 사실은 7·4공동성명을 탄생시킨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공동성명을 발표한 그해 12월 27일 남북한은 동시에 개정헌법을 공표했다.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공교롭게도 똑같은 날짜에 똑같이 1인 권력집중을 골자로 한 개정헌법이 탄생했다.

북한의 개정 '사회주의 헌법'은 권력집중을 요체로 한 주석제를 신설했고 남한의 '유신 헌법'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통격 절대권력을 부여했다.

7·4 공동성명 채택 이전과 이후의 남북간 교류·접촉은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이전에는 적십자회담에 한정됐던 교류·접촉이 공동성명 채택 이후 봇물 터지듯 늘어나 정치, 경제, 체육, 문화 등 다방면에서 활발히 이뤄졌다.

이는 평화공존을 표방한 7·4 공동성명 정신이 남북관계의 밑바탕으로 자리잡게 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한은 7·4 공동성명 채택 20년만에 '통일의 대장전'으로 불리는 남북 기본합의서를 발효시켰고 다시 10년이 지나 6·15 정상회담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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