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포스트 월드컵…자율사회로

한달 동안 온 국민을 열광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월드컵이 마침내 끝났다. 2002월드컵은 한국인의 숨겨진 저력과 열정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분명 승리의 축제였다.

그런데 '좋은 일에는 항상 마(魔)가 든다'는 옛 사람들의 지혜가 맞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도취가 사라진 자리에는 으레냉정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일상적 인식이 적중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4강에 진출하여 3·4위를 가리는 축제의 아침에 우리 영해를 침범한 북한군에 의해 많은 대한민국 군인들이 살상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대∼한민국'을 외쳤을 우리 해군 장병들은 북한군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다.그들 중 4명이 전사하고 1명이 실종되었다. 우리는 서해에서의 북한 도발이 현정부가 이해하려는 것처럼'우발적'인 것인지 아니면 여러 정황이 시사하듯 '고의적'인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만약 북한의 서해 도발의 고의성이 농후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어떤 목적에서 그런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이 사건의 본질은 북한경비정에 의한 무차별 선제공격이 월드컵을 갈무리하는 축제의 아침에 이루어졌으며 그로 인해 다섯 명의 우리 장병이 생명을 잃었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진정 2002 월드컵의 성공을 품위 있는 미래사회의 생산적인 밑거름으로 만들고자 한다면,우리는 이 사실을 냉정하게 성찰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월드컵 성공으로 얻은 활력을 생산적 에너지로 승화시켜 신명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포스트월드컵 사회를 준비하자는 다양한 목소리에는 혹시 모처럼 얻은 열기가 금방 식을 수 있다는 '냄비기질'에 대한 두려움이 섞여있는 것은 아닐까?우리는 혹시 월드컵에 도취하여 냉전의 현실을 망각하였던 것은 아니며 또 우리가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온몸을던져 이 땅을 지켰던 해군장병들의 죽음마저 쉽게 잊혀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 자신이 놀라고 세계를 놀라게 한 월드컵의 열기를 잊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를 위해 희생한 해군 장병들의 생명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월드컵은 개인의 자발성이 마음껏 표출될 때에만 사회의 질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월드컵 이전의 사회가 여전히 국가, 발전, 진보와 같은 현대화의 거시적 명분 때문에 개인이 희생될 수 있는 '타율 사회'였다고한다면, 포스트월드컵 사회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비로소 사회 전체가 발전할 수 있는 '자율 사회'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개인의 생명과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관이 주도하였다면, 과연 수백만의시민들이 거리로 뛰어 나와 열광적인 응원을 하였겠는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경기가 끝난 뒤 쓰레기를 치운 것이 걱정 많은 언론의 계몽 때문이었겠는가? 우리는 거리를 온통 붉게 물들인 응원의 물결 속에서도 표출되는 시민들의 개성을 보지 않았는가? 시민들은 자신의 표현에 조금 더 당당해졌다.

그들은 '남'이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기 때문에 열광하였던 것이다. 하나의 색깔로 획일화된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열광 속에는 사실 나의 분장, 나의 패션, 나의 몸짓, 나의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월드컵을 상생(相生)의 축제로 만든 것이 다름 아닌 '우리 속에 존재하는 나'라고 한다면, 이 내가 자발적으로 우리의 안정과 평화를 염려할 때 진정한 우리의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우리를 지키려다 전사한 해군장병들의 생명이기억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들의 희생을 망각한다면, 개인들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위해희생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개인을 잊지 않을 때에만 '개인'도 우리를 잊지 않는 법이다.

이제는 국가와 이데올로기또는 어떤 정책의 이름으로 개인을 희생시키는 타율사회를 청산하고 개인의 생명이 존중되는 포스트월드컵 사회를 만들어 가자.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우리의 사회! 오, 피스(peace) 코리아!

이진우(계명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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