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연기(緣起)의 세계

며칠 전 일이다. 동료 교수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하여 여럿이 어떤 레스토랑에 갔다. 다른 사람들이 주문한 음식은 다 나와서 거의 식사를 마칠 때가 되었는데도 내 앞에 앉은 여자 선생님의 음식은 나오지 않아서 내가 웨이터에게 잔소리를 했다.

마침 그 선생님의 음식이 나왔다. 그 선생님이 음식접시를 받으려고 앞에 놓인 물잔을 치우려는 순간 그것이 다른 그릇에 부딪혀 깨어지면서 유리 조각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깨진 유리조각을 집어내고 물을 닦느라고 약간의 소동은 있었지만 곧 안정을 되찾는가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떡을 하나 집어 씹는 순간, '바싹'하고 깨어지는 것이 있었다. 조금 전에 깨진 유리잔의 조각이었다.

◈모자이크속 반짝이는 보석

어떻게 그 유리조각을 내가 씹게 되었는가? 내가 그 날 유리조각을 씹게 된 불행은 우연이면서도 우연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내가 그날 그시간 그자리에 앉아 있게 한 것과 연관된 과거 현재의 무수한 조건들과 또한 유리잔을 깬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순간 유리잔을 깨게 한 과거 현재의 무수한 조건들이 조합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접시를 날라 온 종업원과 요리사, 그날 그식당에 가자고 추천한 사람, 유리잔을 그렇게 약하게 만든 사람, 하필 그때 생일을 맞이한 동료 등 무한한 인물과 사물 사건들이 결합되어 그 독특한 상황을 만들고 결국 그것이 내게 유리조각을 씹게 한 것이다. 그 날 그자리에 내가 앉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떡을 거기 놓아두지 않았거나, 내가 잔소리하느라고 그 종업원의 일을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유리잔이 깨어지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 요리사가 웨이터가 적어 준 주문 쪽지를 정확하게 보기만 했어도 모든 음식이 제 시간에 맞추어 나왔고, 그랬다면 내가 유리조각을 입에 넣는 불행스런 일이 예방되었을지 모른다.

내가 그 날 유리조각을 입에 넣었다는 작은 사건으로 해서 나의 운명은 또한 어떻게 엄청나게 달라졌을까? 아직은 모르지만 내가 모르고 삼킨 남은 유리조각이 내 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사건이 그 정도로 심각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나의 운명이 나도 모르게 어떤 방향으로 바뀌었는지 모른다.

유리조각 사건이 아직도 내 머리에 생생한 이 순간에 이 글을 쓰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이 한 조각의 실없는 글을 읽은 누구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런지!

◈우주적 유기체 형성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일을 다 경험한다. 모든 일을 좋은 일, 흉한 일, 아름다운 일, 꺼림칙한 일, 반가운 일, 반갑지 않는 일 등으로 분리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취하고 나쁜 일은 거부한다. 이렇게 사건들을 단편적인 것으로 보면 원망할 사람도 생기고 후회할 일도 생긴다. 그러나 실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도 서로 무한하게 이어지는 인과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좋은 일만 가려서 경험할 수는 없다.

길 가다가 달리는 자동차에 의하여 흙탕물을 뒤집어쓴다고 하는 일은 기분 나쁜 일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 때문에 예정에 없던 세탁소를 찾게 되고 세탁소를 가는 길에 옛친구를 만나고 그것으로 해서 자신의 운명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은 순간에 일어나고 순간적 사건에 의하여 다른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우리들이 아는 것은 오직 자신이 실제 경험하게 되는 것뿐이기에 어떤 궂은 사건이라도 그것 아니었으면 치르게 되었을 만한 더 큰 불행이나 비극에 대하여서는 생각할 줄 모른다.

'나'라는 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모든 사건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모자이크이다. 우리가 생애를 통해 겪은 수많은 사건들 중에는 아름다운 것도 있고 잊고 싶은 흉한 사건들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이루는 모자이크 속의 반짝이는 보석들이다.

그 흉한 것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 역시 없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사는 세상도 온갖 사물 사건들의 조합체다. 이 중에서 취하거나 버릴 우열이나 미추나 선악이 없다. 우리들이 그런 것을 가려내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열이 생기고 미추가 생기고 선악이 생긴다.

불교는 연기를 믿는다.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해 있어서 어떤 것도 어떤 것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을 연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모든 것이 자신과 동체를 이룬다.

나를 형성하는데 관련되지 않은 사물 사건이 없고 내가 사는 세계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나 사물은 없다. 우리들은 그렇게 우주적 유기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김보경 경북대 교수 상담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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