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비-(1) 정신은 살아있다

서구기술문명의 일방적 강제성과 그로 인한 문화.문명간 갈등, 자연파괴, 인간성 상실 등에 대한 위기감 때문일까. 휴대폰 하나로 지구촌 구석구석이 연결되는 등 세계가 획일적으로 단일화 돼 가는 한편으로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은 정비례로 높아지고 있는 느낌이다.

독특한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500년간 사회 정치 경제를 이끌어 가던 선비들의 정신세계와 삶의 자세를 되돌아 봄으로써 가치관 혼란의 시대 우리의 좌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지난달 19일 평일인데도 한낮 비지땀을 흘리며 경북 문경새재 과거길을 오르는 일단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서울서 온 이들 대학원생들은 이곳의 명산 주흘산 등반을 왔다가 옛 선비들의 자취가 담긴 과거길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렀다고 했다.

오래된 길의 흔적을 짐작케 하는 돌무더기만 몇 군데 남아있을 뿐인 평범한 유적이지만 이곳엔 학생들과 일반인 답사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웃 고을 영주시 순흥엔 선비촌이 아담한 모습을 드러냈다. 약 150억원을 들여 만드는 선비촌은 여타 전시관과는 달리 옛 선비들의 의식주와 생활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꾸며질예정인데 미처 문을 열기도 전에 내방객의 문의가 잇따른다.

문의가 쏟아지자 영주시는 선비촌의 관광지 명성을 독점하기 위해 '선비의 고장' 상표권등록 특허신청을 내고 이 선비촌을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가 위치한 영월의 과거길과 연결시킬 계획이다.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의 사상을 재조명하고 선비문화를 보급하자는 뜻에서 지난달 1일 선비문화수련원을 개설하고 여름방학동안전국 초.중.고 교사를 대상으로 연수 희망자를 모집하고 있다.

한번에 2박3일 일정으로 10차례 230명을 입교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현재 수용인원의 2배가 넘는 교사들이 입교문의를 해와 즐거운 비명이다.

첨단통신기술의 확산으로 미국 월 스트리트서 각 나라의 경제점수를 매기고 거기서 두드리는 컴퓨터 키에 따라 지구촌 곳곳에서 웃고 우는 국제금융 만능의 시대에 돈 안되는 전통 선비문화에 대한 이같은 관심은 무엇 때문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이에 대한 찬반논란은 자못 심각하다.

찬성론자들은 대체로 서구 산업기술문명의 획일적 지배와 그로 인한 문화 문명간 충돌, 빈부격차, 자연파괴, 인간성 상실의 위기감이 유교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새삼 불러 일으킨다고 진단한다.

김수중 교수(경희대.철학)는 공저 '공동체란 무엇인가'에서 가족을 기본단위로 한 공동체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이나 자유보다우선시하는 유학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 사상체계가 가족의 해체를 비롯 모든 인간이 원자화되는 현대사회의인간소외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대안이 되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윤천근 교수(안동대.철학)는 '이땅에서 철학하기'에서 인류가 생존의 위기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삶속으로복귀해 절약과 인내를 앞세우는 고전적 생활과 인간다움의 잣대를 내면의 성숙쪽에서 찾는 도덕주의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진정한 아시아적 가치는 아시아가 현대화하기 전의 전통적 삶살이와 지혜에 있으며 그것만이 현대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금장태 교수(서울대.종교학)는 '한국의 선비와 선비정신'에서 선비는 나라의 역사방향을 제시하고 가치기준을 밝히는 전통사회의 기둥 이었다며 불의에 항거하는 그들의 저항정신, 비판정신은 오늘날에 의미깊게 재해석되고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 시각과는 달리 전통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이 이땅에 심은 권위주의, 계급주의, 파벌주의 의식 등 부정적 영향과 부작용에 대한 비판적 시각 또한 만만찮다.

IMF직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펴내 파장을 일으킨 바 있는 김경일 교수(상명대.중어중문학)는 최근 후속 저서 '나는 오랑캐가 그립다'를 내놨다.

전편에서 한일합방 6.25 남북분단 등 한민족의 위기는 당초 거짓에서 출발한 유학을 신봉한데 있다고 주장해 유림단체로부터 제소를 당하기도 한 저자는 후속편에서도 유교의 유효기간 종말을 강조하며 국제화 개방화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유학의 체계가 이땅에 고착되기 전에 가졌던 자유분방함과 용맹성 같은 오랑캐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설가 복거일씨는 '소위 민족주의자들이여! 당신의 자식이 선택하게 하라'고 전통주의자들을 몰아붙이면서 영어의 모국화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그는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지키기는 모국어와는 무관하다며 우리의 현실적 위기는 세계정부 출현의시대에 반근대적 문화유산에 집착하고 있는 국수주의자들의 맹목적 태도라고 질타한다.

이진우 교수(계명대.철학)는 저서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에서 서양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문화제국주의 등 바깥의 도전에 대해 우리 것을 허구적으로 대립시켜 감정적으로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라며 우리것의 가치와 내용이 객관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세계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먼저 규정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문화 상대주의 입장에서 우리의 국학을 기반으로 한 성급한 이론 정립을 경계했다.

서구 문화와 문명의 일방적 세계화에 대항해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를 두고 새삼 재연되는 논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상반된 견해의 차이는 좀처럼 합의점을 찾기 어려울 만큼 심각하다. 그러나 최근 학계의 분위기는 한가지 점에서는 이론이 없어 보인다.

동서양 담론 통합논의가 거듭 제기되면서 국수주의자들도 이제 우리의 전통문화의 장점을 논하더라도 서양의 것과 비교하지 않고는 설득력을 얻지 못하며, 남의 학문을 가져와 자랑하기의 수입학자들 역시 서양의 이론을 이야기 하더라도 우리의 것과 관련지어 논리를 전개하지 않을 경우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난 반세기 수입학문이 판을 치는 바람에 서구의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는 것이 학문의 중심 역할로 여겨져온 우리 인문학계 풍토에 비하면 우리 학문하기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전환에는 우리학문으로 남의학문 넘어서기를 앞장서 주도해온 조동일 교수(서울대.국문학)의 역할이 돋보인다.

그는 현대문명의 위기는 유럽문명권에서 주도해 만들어 낸 자연과학 위주의 근대학문이 파탄지경에 이른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근대이전 4대문명권(동아시아.유럽.서남아시아.이슬람)의 전통사상과 학문을 실증적으로 비교 검토한 후 우리의 선조를 비롯 동아시아 선조들의 전통사상인 생극론(生克論)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조 교수는 세계문학사와 철학사의 전개과정을 통해 고대 선진문명이 중세엔 후진이었으며, 중세에 후진이었던 문명이 근세엔 선진이 된까닭을 생극론의 입장에서 밝히고, 근대의 모순 극복은 지금의 후진이 더 잘할 수 있다며 후학들의 분발을 촉구해 왔다.

그는 우리 학문하기의 실제작업으로서 우리 국문학에서 출발해 동아시아 비교문학을 거쳐 '세계 문학사의 전개'에 이르는 30년간의 방대한 작업을 최근 마무리 지었다. 조 교수의 거대이론 생극론에 대해 일부 비판이 없지 않으나 우리의 주체적 시각에서 우리 문학과 학문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시대의 역사방향을 제시할 책무를 지녔던 선비정신의 계승이 아닐까 싶다.

각자 맡은바 사회적 기능이 갈수록 세분되고 다양화하는 오늘날 엄밀한 의미에서의 선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화 이전시기 500년간유학을 국가통치이념으로 동아시아 대동(大同)의 공동체사회의 실현을 꿈꾸던 선비들의 정신은 아직도 우리주변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다.

그것은 4.19의 주역들이 변절되고 굴절되어 그 세대는 희미해졌어도 그 정신은 이어져 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정신적인 것은 제쳐둔 채 물질적인 것만을 향해 내달리는 것 같아 불안한 세계화시대에 우리 옛 선비들의 정신과 삶의 자세를 되돌아 보며 오늘을 되짚어보는 것이 부질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최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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