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이후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IMF(국제통화기금)식 처방이 너무 가혹한 게 아니냐는 국내외의 비판이 줄을 이었으나 최근에는 잠잠해졌다.
당시 처방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야 훗날 경제학자들의 몫이지만 외환위기를 가장 슬기롭게 극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현 시점에서 새삼 이를 들먹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IMF의 따뜻한 보살핌과 우정어린 지도편달 덕분에 외환위기를 넘어섰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 극복의 핵심은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희대의 국난(國難) 앞에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소명 의식이 국민적 결정체로 똘똘 뭉쳐졌기 때문이다. 지성이면 하늘도 움직인다고 했던가. 때마침 지구촌에는 혁신적 패러다임인 '정보화사회'와 '지식기반경제' 열차가 마지막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열차는 '변화'라는 티켓없이는 탈 수 없는 열차. 마지막 손님은 물론 대한민국이었다.변화하지 않으면 곧 퇴보
국난 극복을 위해 자연스레 결집된 한국민의 '변화'의식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필수조건인 '변화'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인터넷 보급률과 접속률 세계 1위, 유럽을 누른 이동통신사업, IMF도 놀란 경제성장률, IT강국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 선두 경쟁에 치중하다보니 뒤처진 그룹은 부(富)와 소득 분배 불평등에 신음하고 있었다. 첨단에만 매달리다보니 어느 새 배금주의가 뿌리내렸고 신규 사업 이권을 둘러싼 대형 비리가 끊이질 않았다. 지역연고주의가 되살아났지만 IMF '일등 졸업장' 축사에 파묻혀버렸다.
'애국가 4절'에다 '한 마리 연어', 이름조차 외기 힘든 숱한 게이트. 급기야 베란다에 헌수표 10억원을 숨겨놓는 코미디가 판을 치면서 '변화'의 물결이 주춤한 사이 또 하나의 엄청난 변화가 들이닥쳤다. 히딩크와 월드컵 4강 신화가 민족적 자존심에 불을 댕기기 시작한 것이다. 하면된다, 철저한 기초체력, 멀티 플레이를 앞세운 히딩크식 경영에 국민은 열광했다.
몸과 마음이 변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은 그야말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러한 경험은 외환위기 당시 우리사회에 이미 보편화된 패러다임이 아니었던가.그런데도 5년이 지난 지금 똑같은 '변화'에 왜 그토록 광분하는가. 스포츠가 갖고있는 마력 때문인가.
그동안 우리의 '변화'의식이 퇴색했다는 증거는 아닌가. 회한도 잠시, 그렇게 뜨겁던 6월은 지나갔다. 이제 우리 국민은 변화에 익숙해졌다. 아니 변화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변화는 부단한 노력과 희생 정신 없이는 불가능한 것. 변화는 말을 앞세우지 않는다. 오로지 행동으로서 보여줄 뿐이다. 변화는 또 위험(risk)이라는 '악마의 맷돌'위에서 자란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올 때와 유충이 탈피(脫皮)할 때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다. 히딩크 축구를 보라. 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강팀과 싸울 때는 위험을 회피하지않고 오히려 그것을 감내(risk-taking)하지 않았던가.
위험에 정면으로 맞서야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올해 93세다. 거의 해마다 세계적 히트 저작을 쏟아내는 그는 변화와 창조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다. 올해 내놓은 '넥스트 소사이어티' 서문에는 한국이 도전해야 할 4가지를 제시, 그의 혜안에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진다.
첫째, 기업은 '재벌'에서 벗어나 '전문경영'으로 변모해야 하고 둘째, 제조업은 급격히 위축되며 셋째, 한국의 가장 큰 이웃이자 경쟁자로 중국이 등장하고 넷째, 지식노동자가 득세하여 '고용자'가 아닌 '새로운 자본가'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갈 길은 더욱 바빠졌다. "4강에 자만하지 말라. 이제부터 변화의 시작이다"라는 히딩크의 고별사는 피터 드러커의 고언(苦言)이상으로 우리의 가슴을 찌른다. 아직도 냉전 구도가 남아있고, 충성과 복종이 인간가치의 잣대이고, 보수와 진보가 밥그룻 싸움하는 마당에 누가 위험을 감내하려 할 것인가.
그러나 히딩크, '변화하지 않으면 곧 퇴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당신은 다시 한번 보여주었소. 하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그립더라도 한국을 잊어주시오. 한국에는 아직도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오. 변화의 원동력이 사회적 에너지로 승화하는 그날, 당신을 진심으로 환대하리라. 굿바이 히딩크.
윤주태-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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