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자작나무 숲 속을 거닐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모스크바에서 당신에게 띄우는 첫 번째 소식입니다.
어제는 저녁 식사를 두 번 하였습니다. 한 번은 하늘에서, 또 한 번은 땅 위에서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시계바늘을 뒷걸음질시켜 시간을 맞추어 놓았습니다. 그만큼 젊어졌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내일의 일정을 염두에 두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자정이 지났는데도 밖이 훤해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전에 백야 현상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직접 당해 보기는 처음이어서 한동안 뒤척거리다가 겨우 눈을 붙였습니다.
'길떠남'은 에너지 충전 과정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해서 거리로 나섰습니다. 재래시장으로 갔습니다. 마치 우리네 농촌의 닷새장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과일이며 채소 같은 먹을 거리를 올망졸망 챙겨서 좌판을 벌여 놓았는가 하면 그만그만한 옷가지를 가운데 두고 흥정을 벌이는 광경이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닭고기며 돼지고기 같은 육류를 좌판에 얹어놓고 손님을 부르고 있었는데, 포장이나 위생 시설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음료수 한 병을 사 들고 말을 붙여 보았더니 전혀 낯선 사람들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 정도만 해도 형편이 나아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간단한 생필품 하나라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거나 배급을 받았었는데, 지금은 돈만 있으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며 만족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해결할 수 있는, 그래서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사회라고 털어놓는 그들의 우스갯소리 같은 말 속에서 개혁과 개방의 바람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시가지의 교통 사정을 살펴 보았습니다. 영업 허가를 받은 택시는 없다고 들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승용차를 택시처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네 말로 표현하자면 불법 자가용 영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도로의 한가운데 흰색으로 표시된 중앙 분리대 같은 하나의 차선이 있는데, 이곳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후가 되자 갑자기 차량 행렬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의 피서 행렬 같았습니다. 이상해서 물어 보았더니 주말이면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이 시작되는데, 개인 소유인 다차로 가는 차량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차란 우리네 주말 농장쯤으로 생각하면 좋을 성싶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물품은 개인 소득이 되기 때문에 모두들 열심히 일할 뿐 아니라 생산성 또한 매우 높다고 하였습니다.
발레 공연에 관하여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백조의 호수'를 본고장에서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잠시 뒤, 오늘 저녁에 공연이 있다는 대답과 함께 행운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절에 따라 토.일요일에만 한 차례씩 공연하기 때문에 여행자가 그 시기를 맞추기란 쉽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돈으로 10만원에 가까운 입장료를 내고 예약하였습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실 테지만, 도움이 될까 해서 말씀드리자면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의 1877년 작품으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과 더불어 3대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줄거리는, 막 성년이 된 지크후리트 왕자와 이웃 나라의 공주였으나 악마인 로트바르트의 마법에 걸려 백조가 된 오데뜨와의 환상적인 사랑이야기입니다.
많이 보고 듣고 생각…
막이 오르자 발레리나의 세련된 동작과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선율이 조화를 이뤄 관객들을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지크후리트 왕자와 오데뜨 공주의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마법이 풀리고 백조들은 사람의 모습을 되찾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발레 전용극장의 무대 장치며 음향시설이 공연 분위기를 한층 돋우어 주었습니다. 막이 내렸는데도 뜨거운 박수가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뒤풀이가 있었습니다. 마침 안내를 맡아 수고해 준 사람이 이곳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이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친 김에 노래 한 곡을 부르라고 졸랐더니 연속극 모래 시계를 통해 널리 알려진 '백학'을 러시아어로 들려 주었습니다. 그의 훤칠한 체격과 묵직한 목소리가 마치 들에 서 있는 자작나무처럼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길 떠남이란 낯선 곳에서 만나게 되는 풍물이나 그들의 삶이 낯설지 않도록 내 자신을 길들이거나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보고 듣고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김종욱(수필가.전 고령부군수)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