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창석칼럼-내 안에 있는 없음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자연적 힘은 태풍이다. 태풍의 위력은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태풍은 바람과 비, 번개와 파도를 총체적으로 움직이며, 바다와 육지를 막론하고 방대한 지역을 휩쓸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감되는 공포도 높을 뿐더러 실제로 지구상의 그 어떤 재해보다도 강력하다. 그러나 태풍의 위력은 파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지구를 전반적으로 청소할 수 있는 것도 오직 태풍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강력한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태풍의 실체는 의외로 공기요 허공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도 크기와 무게에 있어서 거의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허공이다.

태풍은 허공에서 태어나며, 허공마저 더욱 희박해져서 거의 '없음'이나 다름없는 저기압에서 형성된다. 누가 말했던가? 나비의 가녀린 날갯짓 하나에서 태풍이 시작된다고.

그렇다면 아마도 그 날갯짓은 허공마저 물러난 거의 없음에서 일어나고, 없음에서 휘젓는 날갯짓이기에 주위의 모든 바람과 구름을 흡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태풍은 다름 아닌 '없음'의 폭발력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초의 강력한 폭발력은 다이너마이트이다. 다이너마이트란 언제든지 타오를 수 있는 것을 고요히 정지시킨 상태이다. 마치 폭발의 힘이 그 안에 전혀 없는 것처럼.

그래서 아직 폭발하지 않은 다이너마이트만이 위력적이고 무섭다. 다이너마이트란 말은 다이너믹에서 나왔고, 다이너믹은 가능성 내지는 역동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뒤나미스'에서 나왔다.

가능성이란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곧 일어날 가장 확고한 근거를 말한다. 호박씨 안에는 호박이 없지만, 지금 씨 안에 있는 호박의 '없음'이 수많은 호박을 낳게 된다.

결국 없음의 발견은 앞으로 일어날 가장 강력한 변화의 기초요 출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계는 없음(無)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세계가 창조되었든, 저절로 이루어졌든, 없음으로부터 출발된다는 것은 확고하다. 그러므로 없음은 모든 것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나 역동성을 의미한다. 나아가 없음의 발견은 가장 근본적 변화의 시효이다.

요즘 국가 이미지가 새롭고 강력한 상품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 와중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 코리아는 정적이므로, 강력한 이미지를 부각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

그러나 고요한 아침의 정경보다 더 강한 폭발력을 지닌 힘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국가 이미지든 개인의 이미지든 이미지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빛처럼 발산되는 것이다. 안에 내재된 것이 밖으로 연상되는 것이 이메지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내보인다면 그것은 사기일 뿐이다.

이미지의 변화나 형성도 결국 그 안에 있는 없음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자기 안에 있는 없음을 깨닫지 않고서는 어떤 변화도 희망할 수 없다. 내 안에는 무엇이 없는가? 나아가 우리 안에는 무엇이 없는가? 곰곰이 따져보고 자각해야 할 것이다.

학교에 백년을 내다보는 교육의 없음을, 대학에 즐거운 학문의 없음을, 더불어 사는 사회에 두루 통용되는 윤리의 없음을, 법정에 정확하고 합당한 저울의 없음을, 국회의사당 안에 나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의 없음을, 다양한 정당 안에 별다른 정책의 없음을, 거대한 기업들 속에 경영의 없음을, 병원에 히포크라테스 정신의 없음을 꼼꼼히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꽉 들어찬 아파트에 이웃의 없음을, 다정히 붙어 앉은 연인들과 핏줄로 얽힌 가정에 사랑의 없음을, 결국 기나긴 인생의 여정에 행복의 없음을 거듭하여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나는 내 안에 인간의 없음을 죽는 날까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없음에 대한 각성은 허무주의도 아니요, 염세주의도 아니다. 없음에 대한 통찰은 가장 폭발력이 강한 변화의 시작이다. 우리는 바로 그 없음으로부터 가능한 모든 것들을 희망할 수 있으며, 희망하는 한 언젠가는 일구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없음에의 통찰이야말로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가능성이요 역동성이다.

신창석(대구가톨릭대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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