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읍참'하던 그 마음으로…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말이 있다. 중국 촉나라의 제갈량(諸葛亮)이 아들처럼 아끼던 참모 마속(馬謖)의 군령 위반을 문제삼아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벤 고사(故事)를 일컬음이다. 제갈량이라면 2천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국·중국·일본에서 군신처럼 떠받들리던 문무겸전한 불세출의 인물-.

그처럼 지혜로운 제갈 선생이 마속의 죽음이 아까워 못내 며칠을 울었다면 마속의 인물됨 또한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그렇지만 나라를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신상필벌의 대의명분을 저버릴 수 없었기에 '울면서' 마속을 베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니던가.

일찍이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세가지 기본으로 배불리 먹이고(경제), 튼튼히 지키고(안보), 백성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신의)고 했다. 그리고 식량과 군대를 버릴지언정 마지막까지 그 정치가 믿음을 잃어서는 안된다고도 했다.

결국 제갈 선생이 마속을 처단한 것은 사사로운 온정주의를 버리고 백성에게 신의를 지키기 위한 절체절명의 결단이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국난기의 지도자에게는 화려한 백번의 웅변보다 단 한번이라도 제 살을 도려내는 읍참마속의 자기 희생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렇게 해야 국민이 감동하고 정치가 살아난다.

또 나라 전체에 활력(活力)이 생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게 없다. 과거 정권부터 눈을 씻고 살펴봐야 지역 편애요 인사 편중이다. 내 자식 내 선후배는 아무리 잘못해도 감싸주고 상대방은 걸핏하면 추상같이 몰아댄다. 상대방이 아무리 정당한 지적을 해도 잘못을 고치기보다는 "…꼭 그렇게 따지고 든다면 너희 총재의 원정출산도 따지고 총재 아들 병역비리도 파헤쳐보자"는 식의 비겁한 맞불작전으로 맞서는 게 고작이다.

이처럼 대의명분보다는 내 고향사람 따지고 우리 당(黨) 따져 인정따라 감싸다보니 멀쩡한 '대한민국 정치인'이면서도 이 땅위의 어느 한쪽 지방과는 아예 등진 채 '전라도 대통령', '경상도 국회의원'으로 전락한 그런 기이한 꼴을 겪으며 살아온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

이처럼 감정적이고 이기적(利己的)인 정치판에 자기 희생이 있을리 없고 정치가 주는 감동 또한 있을리 만무하다. 그 대신 피곤한 변명과 집권을 위한 당리당략만 난무하는 게 우리 정치현실인 것이다. 경제규모가 세계 12위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기적을 이루고도 정치가 백성들에게 왕따당하는 이유도 바로 국민을 감동시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전 서해교전 당시 산화한 해군 장병의 영결식에 총리와 국방장관 등이 참석 않았다는 비난의 소리가 높자 영결식이 해군장(海軍葬)이기 때문에 의전상의 문제로 참석지 못했다는 말같잖은 설명이 나왔고 이에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던 것이다.

꽃같은 청년들이 이렇게 총 잡고 스러져가는 한편에선 장상 총리서리 같은 상류층 인사들이 아들 외국 국적으로 병역을 비롯한 각종 혜택 누리고도 모자라 권력잡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면 누군들 군대가서 나라 지킬 마음 나겠는가.

아마 이 땅의 상류층 인사들이 읍참마속의 의미나마 한번이라도 되새겨본 일이 있다면 부끄러워서라도 "저는 장관감이 아닙니다"라고 입각을 거절했을 법도 하다. 그럼에도 이번뿐 아니라 심심찮게 이런 문제가 불거지는것을 보면 이들의 배짱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이 나라 상류층사회에서는 이중국적이나 원정출산 문제는 일반화된 현상인지 가늠이 안된다.

우리 같은 서민이야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쩐지 이런 지도자들에 대해 존경은 커녕 양다리 걸치고 제것만 챙기는 기회주의자의 표본을 보는 것만 같아 정나미 떨어진다. 나는 우리처럼 지역감정의 골이 깊은 나라일수록 '나와 내 사람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정치로 국민을 감동시키는 그런 다스림이 절실하다고 본다.

아무리 감정의 골이 깊다한들 최고 지도자가 제 자식 먼저 나무라고 제 부하 잘못부터 먼저 꾸짖으며 공평무사하게 국정을 이끄는데 어찌 경상도, 전라도 따지겠나 싶은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국가경영에는 미래를 보는 높은 안목과 탁월한 전문성, 뛰어난 용인술(用人術)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도 읍참마속 할 수 있는 자기 희생의 정신을 제일로 꼽고 싶은 것이다.

월드컵 이후 세계가 부쩍 다가왔다. 그런 만큼 정치인들은 지금까지의 이기적 꼼수 정치를 버리고 내 한몸 던질 수 있는 '희생의 정치'를 위해 분발할 일이다. 무엇보다 월드컵으로 한껏 고양된 이 국민적 감동을 승화시켜 국운 상승의 밑거름으로 마무리짓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할 것이다. 외유나 하고 상위배정을 두고 멱살잡이나 하면서 집권 욕심이나 내는 몰염치는 이제 그만둘때다.

김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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