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상희 칼럼-뿌리깊은 나무

옛날 어느 시골의 가난한 집안의 한 소년이 글을 배우고 싶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집안형편이 조금 나아져서 마침내 서당에 가게 되었다.

서당에 입학하던 첫날 그는 관례에 따라 '천자문'(千字文)을 먼저 배우기로 했는데 첫날에는 훈장으로부터 천자문의 첫구절에 나오는 '천(天)·지(地)·현(玄)·황(黃)'의 네글자를 배웠다.

그런데 훈장은 그 이튿날는 또 그 다음날도 계속 같은 글자만 되풀이해서 읽게 하고 그 이상 한자도 더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달이 가고 해가 갔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벌써 '천자문'을 떼고 '계몽편'·'명심보감'·'통감' 등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선생은 그에게만은 네글자만 계속 읽게 하였다.

세월이 흘러 '천·지·현·황'의 네글자만 읽은지 꼭 3년이 되던 날 그 소년은 "후유"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천·지·현·황'을 삼년독(三年讀)하니 '언(焉)·재(哉)·호(乎)·야(也)'는 하시독(何時讀)고"라고 하였다.

여기의 '천·지·현·황'은 '천자문'의 첫번째 구절에 나오는 네글자요, '언·재·호·야'는 제일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네글자다. "'천자문'의 첫번째 구절에 나오는 네글자를 읽는데 3년이나 걸렸으니 그 마지막 구절까지 어느 천년에 다 읽을 수 있을꼬"하고 탄식을 한 것이다. '천자문'은 네글자를 하나의 구로 하여 모두 250구로 되어있으니 그대로 지금처럼 읽어나간다면 750년이 걸리는 것이다.

소년의 이 말을 들은 선생은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너는 이제 글을 다 배웠다. 더 읽을 것이 없구나. 나는 이제 너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느니라. 서당에서 나가도록 하라"고 했다.

이 소년은 '천·지·현·황'의 네글자 이외는 배우지 않았지만 이미 '천자문'의 마지막 글자까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공부하는 분야까지 모두 섭렵하였을 뿐만 아니라 칠언시(七言詩)까지도 훌륭하게 지을 수 있기에 이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물론 누군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무엇인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옛날 수공업에서의 기술의 전수는 주로 도제(徒弟)제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경우 선생 즉 기능보유자는 제자 즉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절대로 처음부터 그 기술의 핵심부분을 먼저 가르치지 않고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그 업무 전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하찮은 허드렛일부터 먼저 시켰다고 한다.

예를 들면 대장간에서는 풀무질만 시키고 의원의 경우에는 약을 다리는 부채질만 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동작을 한없이 되풀이하는 동안 인내심과 의지를 길러주고 그 업무의 분위기를 대강 익히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핵심적인 기술을 하나 둘씩 단계적으로 가르쳐 나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업무수업의 기본정신은 오늘날 그대로 이어받아도 크게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오늘날 우리는 흔히 기업의 경영권을 아무런 경영수업을 받지도 않은 기업주의 2세가 세습을 하는 경우를 본다. 또 해당업무에 별로 경험이 없는 사람이 이런저런 연유로 해서 정부의 고위직에 취임하거나 선출직에 입후보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물론 그 직무와 관련된 수업을 한 일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실패를 하고, 반대로 그 업무에 경험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대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당해업무와 관련된 경험과 지식을 너무도 소홀히하고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특정업무에 대한 폭넓은 경험과 지식은 그 업무의 발전과 위기관리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마치 나무에 있어 뿌리의 기능과 흡사하다고 할까.

나무의 모양은 그 뿌리의 모양에 의해 결정된다. 대지 위에 튼튼한 가지를 힘차게 뻗으며 거목으로 자란 나무는 바로 그곳에 뿌리를 내린지가 오래이다. 그리고 그 뿌리는 땅속 깊이, 그리고 폭넓게 뻗쳐 있다. 그러한 나무는 비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몰아쳐도 꿋꿋이 서 있을 수 있다.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나무가 어찌 세찬 바람에 견딜 수 있겠는가?

화려한 자리라고 하여 겉모습만 보고 경험도 없는 사람이 뛰어드는 경우에 성공이 반드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별다른 경험과 재주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좋은 직장만 찾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사람에게 행운의 신이 반드시 그의 편에 서 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조선조 초기에 만들어줬던 '용비어천가'제2장에서는 "뿌리갚은 나무는 바람에 흔드리지 아니할새, 꽃이 아름답게 되고 열매도 잘 맺나니"라고 읊고 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해지는 법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