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류도매상 소석구씨

의류 도소매상이 몰려있는 대구 서문시장 5지구. 이곳에 자리잡은 수많은 점포 중 하나인 회전상사 소석구(54) 사장은 30년 가까이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상인이다. 머리에 온통 서리가 앉아 백발이 된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지만 장사에서만큼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고집이 묻어나는 중년의 남자다.

월드컵 열풍이 몰아닥친 지난 6월 한달동안 소씨는 붉은 악마 티셔츠 때문에 홍역을 앓았다. 16-8-4강으로 이어지는 태극전사들의 승전보에 평상시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붉은 색 티셔츠가 시중에 바닥 날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업계에서는 물량을 대느라 한바탕 씨름을 했다.

하지만 정작 재미 본 사람은 따로 있을 정도로 일시 유행에 불과한 특수에 소씨는 들뜨지 않고 정상적인 영업에 비중을 둬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봉제공장마다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여 시름에 젖어 있지만 그는 큰 손실없이 여름을 나고 있다. 20대 청년시절 무일푼에서 시작, 30년동안 나름의 상도(商道)를 지키면서 터득한 그의 장사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풍이 고향인 소씨는 유년시절 지독한 가난을 체험했다. 논밭뙈기 한 평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그는 20대때 처음 손을 댄 제빵공장마저 화재로 몽땅 날라가면서 1975년 봄 대구로 이사했다. 27세때였다. 그러나 수중에는 땡전 한 푼 없었다.

호구책을 찾던 그가 시작한 일이 바로 의류 노점이었다. 한 손이면 충분한 티셔츠 30장이 전부였다. 남들은 자전거나 리어카에 가득 실어 전을 벌였지만 그에게는 그만한 자본이 없었다. 실망하지 않고 그는 꿈을 꾸었다. 언젠가 자전거에 옷을 가득 실어 팔겠다고.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금씩 돈을 벌어 자전거와 리어카 행상으로 커졌다. 당시 취급했던 의류는 나일론으로 만든 메리야스. 정품도 아닌 하자가 있는 차품을 저울에 달아 사온 후 소매로 팔았다. 대구와 서울 등지의 공장에서 메리야스 관당 7천500원에 구입, 밤잠자지 않고 경남북 여러 지역을 뛰어다니며 1만5천원에 팔아 두배의 이익을 남겼다.

소씨는 철이 바뀔 무렵이면 어김없이 대구역이나 동대구역에 나가 몇 시간이고 행인들을 관찰한다. 유행할 옷 색깔을 조사하기 위해서다. 이런 노력 덕에 사업은 조금씩 커졌다.

서울의 거래선에서 물품대금을 현금으로 결제하기를 요구했지만 소씨는 절대로 현금 결제를 하지 않고 대신 수표로 주는 고집을 부렸다. 70년대만 해도 수표 추심기간이 1주일 가량 걸렸기 때문에 그 기간만이라도 자금이 대구에 더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애향심이랄까. 하여튼 그는 별종이다.

의류업에 뛰어든지 20년만인 지난 96년 서문시장에 점포를 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행상에서 노점 등 험로로 이어진 그의 인생. 꿈에도 바라던 가게를 얻고 정착하게 되면서 그의 생활도 크게 나아졌다.

하지만 소씨는그 흔한 해외여행 한번 가지 않을 정도로 검약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공연한 해외여행이 가져올 외화 낭비가 마뜩찮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짠지'라고 쑥덕대지만 그는 우리나라 구경 다하고 나중에 해외여행도 갈 것이라고 둘러댄다.

하루종일 시장통에 매여 있는 몸인 탓에 소씨는 휴일이면 산과 들로 나가는 여행을 즐긴다. 지난 82년부터 선배의 권유로 사냥에 입문, 해마다 사냥철이면 부부 함께 꿩 사냥에 나선다. 큰 돈 들지 않고 마음껏 대자연을 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온갖 궂은 일도 마다 않고 가장으로서 잘살기 위해 노력해온 소씨는 요즘 3D업종을 기피하는 세태를 나무란다. 무슨 일이든 땀흘려 노력하면 먹고 사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일이 험하다고 빈둥대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눈물나는 젊은 시절이 머리속에 떠오른다고 말했다.

때로 어려움도 있었지만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고 꿈은 언젠가 이뤄진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일했다는 소석구씨. 그는 지난 30년동안 큰 욕심내지 않고 열심히 일한 것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된 힘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서종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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