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대 명시조 100선

'정강이 말간 곤충 은실 짜듯 울고 있는/ 등 굽은 언덕 아래 추녀 낮은 집이 한 채/ 나뭇잎 지는 소리가 작은 창을 가리고/ 갈대꽃 하얀 바람 목이 쉬는 저문 강을/ 집 나간 소식들이 말없이 건너온다/ 내 생애 깊은 적막도 모로 눕는 월정리'(유재영 시조 '다시 월정리에서').

여백과 침묵 그리고 짧지만 긴 여운…. 예술적 향취 그윽한 우리 시조에 응축된 아름다운 시적 이미지와 어깨가 절로 들썩이는 가락에다 사군자라도 한폭 그려넣은 부채 한장이면 여름 무더위인들 뭐그리 대수일까.

시조시인 권갑하씨가 해방 이후 발표된 현대시조 중 울림이 크고 여운이 긴 명시조 100편을 가려뽑아 자신의 독특한 성찰을 해설로 곁들인 시조 묶음집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꽃이 왜 붉으랴'(도서출판 알토란)를 출간했다.

정완영.박재삼.이상범.이우걸.유재영 시인을 비롯, 이종문.홍성운.강현덕 등 젊은 시인에 이르기까지 자유시보다 아름답고 산문시보다 더 섬세한 현대시조 절창 100편의 깔끔한 편집 또한 시조같다. 리강룡.문무학.민병도.박기섭.이정환 등 지역 시인들의 작품도 눈에 띈다.

우리 시조가 현대시의 모습으로 오늘날까지도 활발한 창작이 이루어져 오고 있는 것은 '세우고 펼치고 맺는' 초.중.종장의 뛰어난 시적 구조, 특히 종장에 시상의 반전 구조를 갖춘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민족의 혼과 숨결로 빚어진 자연화된 문화양식에 다름아니다.

시조집을 엮은 권씨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 시조에 대한 홀대는 일제의 왜곡 탓도 있지만, 무분별한 서구문화에 휩쓸려 소중한 전통문화를 천시하고 배척해온 타율적인 근대화와 문학적 졸개근성에 바탕한 문화적 오류에 기인한다고 밝혔다. 일본이 전통시 하이쿠에 대한 자부심으로 서구의 근대 자유시를 사생아처럼 박대한 문화적 깡다구를 가진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한글이 민족의 숨결이자 운율인 시조형식을 만나 빚어낸 고상하고 울림이 있는 시세계. 자유시에 가려 일반독자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없었던 우리 시그릇 속에 담긴 고유한 맛과 멋이 새삼스럽다.

오래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게 우리 시조이다. 단숨에 그 맛을 허락하지 않는 우리네의 심성을 닮아서일까. 모쪼록 이번 기회에 시조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의 빗장을 풀어버리면 좋겠다.

격조 높으면서도 여운이 긴 우리 현대시조의 서정적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다 보면 어느덧 가을을 알리는 산들바람이 코끝에 와 있을 듯하다. 그것은 월드컵으로 새삼 확인된 우리 것에 대한 참다운 가치의 눈뜸이기도 하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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