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도산서원 '禁女 해제'

그리스 북동부의 아토스 수도원 자치구역은 조그마한 반도 전체가 9세기부터 외부인들의 출입이 제한돼 있다. 20여개의 고풍스런 수도원들이 옛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는 이 정교회 신자들의 성지(聖地)는 특히 여성들의 출입이 절대 금지돼 있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유람선을 타고 해안에서 500m 이상 떨어져 구경하는 게 고작이며, 심지어 동물마저 암컷은 반입을 막는다고 한다. 1060년 비잔틴 황제가 이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칙명을 내리면서 수도 행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여성 출입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역사와 규모가 아토스와 비교가 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도 금녀(禁女)의 성역이 없지 않았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도산서당(陶山書堂)이 그가 작고한 뒤 4년만인 1574년 유림과 제자들에 힘입어 규모가 커진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변신한 이래 수제자 월천 조목(月川 趙穆) 선생이 종향된 상덕사(常德祠)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그 성역도 이젠 빗장이 풀렸다. 지난 22일 상덕사에서 여교사 15명이 남자 교사들과 나란히 의관을 갖추고 퇴계 선생 위패 앞에서 참배하는 알묘(謁廟) 의식을 가졌다.

퇴계 선생의 후손·제자들의 모임인 '도운회'와 유림들의 모임인 '대당회'가 지난 4월 여성들의 공식 참배를 허용하고, 교사·학생들의 현장 학습의 장으로도 개방키로 결정한 데 따른 '금녀(禁女) 해제'였던 셈이나, 그의 위패를 모신 이후 400여년만에 처음 이뤄진 일이어서 화제를 낳고 있다.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건립돼 선조가 현판을 내리기도 했던 도산서원은 그간 유교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에 따라 여성들의 상덕사 출입을 허용치 않았으며, 남성들의 전유물로만 자리매김해 왔었다.

이날 알묘를 마친 여교사들이 서원의례를 배우고 선비정신에 대한 강의를 들었던 전교당(典敎堂) 역시 마찬가지다. 이 서원의 중심 건물로 퇴계 이후 영남 유학(儒學)의 총본산 역할을 해 왔던 이곳에 여성이 공식적으로 출입한 경우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퇴계 선생의 삶을 체험하기 위한 이 행사는 여교사 87명을 포함해 전국의 초·중등 교사 230명이 이날부터 8월 말까지 8차례로 나눠 도산서원 내 선비수련원에서 2박3일간 생활하면서 계속된다고 한다. 시대적 추이에 따라 '색부득입문(色不得入門)'이라는 원규도 내려 '성현도 시속을 따른다'는 말도 실감이 나지만, 그 상징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

보수적인 유림 쪽에서 먼저 여성들에게 손을 내밀어 신선한 느낌이다. 세계에서 유교 문화의 전통이 가장 강한 우리나라에도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는 모양이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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