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비-(4)통찰력 높았다

간혹 서점에 갈때면 며칠새 새로 쏟아져 나온 신간들에 주눅이 들어 어떤 것을 골라 읽어야 할지 망설여 지는 때가 많다. 그리고 전세계를 네트워크화 하고 있는 인터넷에 들어가면 누구나 지구촌 구석구석의 최신 정보지식을 접속자가 원하는대로 뽑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정보화 시대라는 말이 실감나도록 지식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옛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정보량에 비례하는 만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요즘 학생들은 먼나라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에서 생명공학의 지식까지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똑똑한 아이들이스스로 판단하고 제힘으로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대학생들까지도 매사를 부모가 가르쳐 줘야하니 마치 판단능력이 없이 그저 정보만 가득 내장된 컴퓨터와 같다.

국가지도자들의 나라경영도 마찬가지다. 몇년은커녕 몇달도 못가는, 저런걸 정책으로 내놓는가 싶은 것들이 수두룩 하다. 왜 그럴까. 세상을 폭넓게 볼 수 있는 안목과 통찰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맡은바 직분이 극도로 세분화된 오늘의 사회체계에서 개인은 자기가 맡은 일 한가지만 잘하면 살아갈 수 있게 돼 있다.그래서 학문도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문학만하고 철학이나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은 철학이나 역사공부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세부전공으로 나눠지고 날이 갈수록 더욱 전문화 하는 추세다.

이 때문에 현대인들은 삶살이의 이치를 종합적으로 따져 결론을 내리는 통찰력이 약화되면서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읽게 돼 버렸다. 뿐만 아니라 좁은 시야서 제각각 나온 이론과 주장은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사회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옛 선비들의 배움은 총괄학문 이었다. 문학(文) 사학(史) 철학(哲)을 아우르고 여기에다 예절.노래.활쏘기.말타기.서화.산술 등 육예(六藝)를 배우고 익혀 전인적 인격체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기초학문인 '소학''대학''논어''맹자' 사서(四書) 다음으로 공부하는 오경(五經)은 오늘날의 학문영역으로 구분하면'시경'(詩經)은 문학, '역경'(易經)은 철학, '서경'(書經)은 정치, '예경'(禮經)은 도덕, '춘추'(春秋)는 역사에 해당된다. 따라서 옛 선비들은 오늘날의 인문학 사회학 자연학문을 함께 배우고 익혔던 것이다.

옛 선비들은 이처럼 여러분야를 함께 연구하는 총괄학문을 함으로써 폭넓은 안목과 통찰력을 지닐 수 있었다.그리고 이같은 안목과 통찰력은 각 시대 전환기에 민족의 사상을 혁신하는 창조력 발휘로 나타날 수 있었다.

14세기 말 조선왕조를 이룩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정도전은 마음(心) 신체(身) 사람(人) 물질(物)은 서로 통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이상적인 사회가 구현된다며 전시대 불교의 인식론과는 다른 신유학의 인식론을 마련, 조선왕조의 설계도를 완벽하게 완성했다.

18세기 임성주와 홍대용은 하나의 기(氣)가 오르고 내리며 날리고 퍼져나가며 느끼고 만나 천지만물에서 사람의 마음까지 모든 것을 두루 형성하기 때문에 일체를 통괄해서 인식할 수 있다고 하고, 그런 논리를 적용해 중세의 이기(理氣) 시가(詩歌) 귀천(貴賤) 화이(華夷)의 차등론을 불식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쉬워하고 부러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세상만사를 총괄해서 보던 옛 선비들의 통찰의 지혜와능력이며, 만사를 조각조각 세분화 해 보기만 하는 이 시대에 더욱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최근 이 지역서 논란이 된 대구기후논쟁과 인공복제배아논란이 이를 잘 대변한다. 대구기후논쟁은 2년전 모대학 환경학부연구팀이 대구시에서 몇 년간 나무를 많이 심어 대구의 여름 기온이 6년전에 비해 약 1℃ 낮아졌다고 발표함으로써 발단이 됐으나, 연구팀이 올해 봄 이 발표를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엉터리로 드러났다.

이 연구팀의 기온이 낮아졌다는 논거는 단순히 대구시에서 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사실을 대구기상대의 기후변화추이에맞춰 이론화 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구의 앞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대구도심의 모습은 시가 심은 나무는 보이지 않고 나무를 베어버리고 들어선 거대한 아파트촌 만이 드러날 뿐이어서 앞산에 한번이라도 올라가 본 사람이라면 나무심기와 기온강하는관련이 없음을 단번에 알게 된다. 그런데도 이같은 연구결과를 내놓은 것은 연구팀의 통찰력 부족이거나 아니면 연구용역 발주처의 입맛에 맞춘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한 민간연구소 클로네이드가 시도하고 있는 복제아기출산 역시 얄팍한 안목의 대구기후연구와 다름이 없어 보인다. 연구소측은 불임부부의 행복추구권이라 강변하지만 전문화한 과학이 통찰의 지혜를 외면함으로써 진실추구라는 본래의 임무에서 일탈, 기업에 봉사하는 지식으로 타락해 빚어지는 현상일 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과학 위주의 서양학문이 파탄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유럽문명권의 학문은 중세기때 까지도 분석적인 과학과 종합적인 통찰의 방법을 병행했으나 근대 들어서면서 자연과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높이고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은 열등한 학문으로 규정하면서 통찰의 중요성을 무시해 왔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세계사적 문제인 지구환경파괴를 비롯, 문명갈등 가족파괴 남북 빈부격차 등 난제를 하나도 해결 못하게되자 통찰을 회복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통찰(通察)의 학문은 4대문명권 가운데 동아시아문명권이, 그 가운데서도 조선의 옛 선비들이 가장 잘했다는 사실은우리에게 큰 희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근대로의 전환기 과학을 멀리하고 통찰의 지식에 머물러 있다가 근대화엔 뒤져 후진이 됐지만 통찰이 다시 중요시 되는 근대극복의 시대엔 더없이 유용한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옛 선비들의 전통학문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 위기의 인문학문을 되살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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