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창석 칼럼-추억과 이상의 비례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회에 갔다. 조그만 시골 초등학교였지만, 대구 사람도 찾기 어려운 근교의 깊은 산 속에서 개최되었다.누군가가 말했다. 대구서 할 바에는 좀 그럴듯하고 빛나는 데서 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골짜기냐고 물었다.

특히 고향에 살던 친구들은 먼 길을 달려 대구까지 와서는 다시 깊은 팔공산 골짜기까지 온 것이다. 그래도 모두들 빗줄기 내리는 어설픈 장소에 더 만족했다. 어릴 적에 늘 맨발로 건너던 계곡과 솔방울 주우러 다니던 숲이 보이기 때문일까? 가재며 물고기를 잡던 시내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늘 듣던 개울물 소리가 지친 중년의 영혼을 위로하는 걸까?

이런 저런 요식이 끝나고 여흥 시간이 되었다. 이번에는 밤을 지샌다는데, 깊은 골짜기에서 중년의 아줌마·아저씨들이 도대체 어떤 이벤트로 밤을 새울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노래가 나오고, 손뼉을 치고, 하나 둘 일어서서 춤을 추는가 하면, 몇몇은 아랑곳하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에 빠지고.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노는 데로 끌어내던 친구가 또 이야기에 빠지고. 어릴 적 모습에 중년의 얼굴을 분장한 것처럼, 옛날 그대로 노는 사이에 날이 새고 있었다.

모두들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각자의 이상을 향해 뿔뿔이 달려왔겠지만, 어쩌면 그 길은 추억이 머문 자리로 돌아오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삶의 이상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겠는가? 결국 어릴 적의 추억이 삶의 이상이 되지 않겠는가.누구나 성공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러나 성공한 인간과 성공한 인생은 같은 것이 아니다.

성공한 사람은 남들이 우러러 보는 결과를 낸 사람들이지만, 성공한 인생은 남의 시선이 귀찮을 만큼 유유자적하는 삶이다. 그리고 인간은 늘 바라보던 풍경,늘 듣던 소리, 늘 머물던 자리로 돌아갈 때 마음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우리의 눈길을 주고, 발길이 머물고 그리고 손길이 닿던 것들이 추억의 내용이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그러한 흔적이 문화의 내용이다. 그런데 주5일 근무제가 확산되면서 새로운 풍경이 격해지고 있다.

금수강산 골짜기마다 조상의 손때 묻은 한옥과 아이들이 뒹굴던 언덕을 밀어내고 여가시설이며 전원주택을 가장한 별장들이 들어서느라 한창이다. 인터넷에는이름 모를 동호회며 낯선 나라의 여행상품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여가의 활용 방식은 민족의 문화와 의식을 좌우하는 요인이다. 우리가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뿌리는 어디 있는가? 과연 어떤 풍경에서 어떤 활동을 할 때 우리는 영혼까지 편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자신의 오랜 추억 속으로, 몸에 배인 문화 속으로 침잠할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개인의 이상은 추억 속에서 싹트고, 민중의 추억 속에서 한 민족의 문화가 자라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늘 즐기고 매진하던일들이, 우리가 고사리 손길로 매만지던 것들이 문화이다.

오직 성공을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면, 스스로 성공한 사람이라고자부한다면, 진정한 영혼의 휴식을 위하여 버려진 한옥을 하나 찾아보면 어떨까? 틈틈이 찾아가 툇마루에 윤도 내고, 마당 한편에 텃밭을 가꾸면 어떨까? 한지로 도배를 하고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어보면 어떨까? 뒤뜰에 술이 익는 동안에,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던 일과 생각을 자식들에게 들려주면 어떨까?

이렇게 되돌아보면서 살아간다면, 금지옥엽 자식을 외국으로 팔아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식의 국적을 바꾸는 것은 부모의 권리도 아닐뿐더러, 그 자식의 후손들에 대한 권리는 더더욱 아니다. 철없는 자식의 국적을 바꾸느니 차라리 이 땅을 팔아버리는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이 땅은 후손들이 되살 수도 있지만, 버린 국적과 추억 그리고 문화는 영영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우리 자식들의 이상이 과연 어디에서 싹트는지, 늘 놀던 개울가에서 밤 새워 노는 사람들의 추억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대구가톨릭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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