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소리없는 함성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빛 바랜 이야기다.길을 걷다가도 국기 강하식과 마주치면 그 자리에 장승처럼 멈춰 서던 시절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급한 약속이 생기는 날에는 안절부절 못하고 애국가가 다 끝나기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한 때였다.

안면 바꾸고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비껴가고 싶은 심정이지만 차마 주위의 시선이 따가워 애국하는 길을 택하는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했다. 권위주의시대에 겪었던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자의든 타의든 대부분 사람들은 당시 그런 분위기에 꽤나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도 태극기에 대한 선입견은 나라를 위해 순국한 우국지사들의 가슴속에 품었던 태극기거나, 국제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고 시상대에 올라 태극기를 바라보며 가슴 벅차 환희의 눈물을 흘리던 기억들이 거의 전부 다.

그러나 2002 월드컵을 계기로 어느 새 태극기는 모든 국민의 혼과 마음이 하나로 응집된 상징물이요, 일상의 귀한 존재로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6월의 신화와 더불어 우리에게 안겨준 소중한 선물이다.

어지러울 정도로 분주함 속에서도 우리 모두의 결집된 힘과 질서의식은 과거 상상조차 못한 놀라운 순간들이었다. 언제 우리가 그토록 위대한 힘을 숨겨 놓았을까? 그러나 7월의 국경일, 제헌절에까지 그 힘이 이어지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제헌절이야말로 온 국민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법을 제정한 날이라는 것쯤은 국민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법 앞에서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말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소리다. 그러나 정작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가난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오히려 법 앞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온 경우도 많았다.

때로는 권력 있고 힘있는 자들이 앞장서서 법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오만함을 보여준 적도 있다. 민심이 천심이라 했던가. 태극기가 걸려야할 자리에 태극기가 없음은 바로 법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함성이 아닐까?곧 다가올 광복절은 또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김경배(인간문화재.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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