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돼지 가족'과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기억하십니까. 그걸로 부족하면 '밀레의 만종'이나 '갈매기 날고 돛단배 있는 그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면 어떨까.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으면서 졸린 눈으로 바라보던 추억의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속칭 이발소그림. 싼 가격과 서민정서에 부합되는 소재를 앞세워 순전히 사고 팔기 위한 상화(商畵)를 일컫는다.
요즘 이발소그림을 판매하는 곳이 부쩍 늘었다. 화랑이 몰려있는 대구 봉산동문화거리는 물론이고 시내중심가, 백화점, 액자점, 호텔로비, 대형병원, 트럭행상 등 곳곳에서 성업중이다. 한 업자는 "개업하는 곳이 워낙 많아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렵지만, 대구시내에만 100개는 넘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곳을 찾으면 대중의 그림 취향에 대한 변화를 느낄수 있어 재미있다. 70, 80년대의 '흑돼지 가족'이나 '가화만사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화사하고 예쁜 색깔의 풍경.정물화가 대부분이다. 이발소에는 선정적 사진이 그림을 대신하고 있듯, 아파트 거주문화에 맞춰 그림 스타일이 크게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싼 가격. 전업화가들의 엄청난(?) 가격에 비해, 5천원(1호-우편엽서 크기)부터 100만원대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저렴하다. 이들 그림은 전문 화가가 아닌,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들은 주로 서울 용산의 작업실에서 호당 2천~3천원을 받고 그림을 그려주는 게 보통이다. 유명 기술자나 대구의 몇몇 기술자는 뛰어난 모사실력을 바탕으로 호당 1만원까지 받는다. 이들은 한꺼번에 10여개의 캔버스를 세워놓고 동시에 작업을 하면서 기술자 한명이 하루에 수십점을 그려낸다. 붓으로 그림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방식이다.
한 관계자는 "얼마전 대구의 한 기술자가 뛰어난 모사실력을 인정받아 개인전을 열고 정식 화가로 데뷔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실력있는 기술자가 꽤 많다"고 말했다.
그림 소재로는 국적불명의 풍경.정물화가 상당수이고, 몇몇 유명작가들의 작품을 교묘하게 짜집기한 그림도 적지않다. 아예 대구에서 활동하는 몇몇 구상작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놓은 것도 꽤 있다.
문제는 일부 업소에서 그림 가격을 너무 높여 팔고 있다는 점이다. 20호 크기에 20만~30만원선이 보통이지만, 50만~60만원은 물론 심지어 100만원대의 가격대를 붙여놓은 곳이 가끔 눈에 뛴다.
한 업소주인은 "일부에서는 일회성 손님을 노리고 비싼 가격을 받는가 하면 전문 화가의 그림인 것처럼 속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발소그림이 서민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싼 가격에 있지 않을까.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이발소 그림.작가작품 구별법
보통 이발소그림과 전문 화가의 작품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이발소그림도 작가의 작품인 것처럼 위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제대로 볼줄 알아야 제 가격에 살 수 있다.
첫째, 작가 작품은 작가 본인이나 전문 화랑에서만 구입할 수 있고, 다른 곳에서 구입했다면 대개 이발소그림. 화랑이라는 간판만 걸어놓는 곳도 많으므로 유의할 것.
둘째, 그림에 작가의 철학이나 개성이 뚜렷하게 들어가 있는지를 봐야 한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소재를 택했다면 이발소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셋째, 기법적으로는 그림을 예쁘고 화사하게만 그렸거나, 물감을 마치 날아갈 듯 가볍게 칠한 것이라면 이발소그림이라 보면 옳다. 품위가 떨어지고 금방 싫증날 듯한 느낌을 준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