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反美) 감정의 고조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배울 것이 많다는 주장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최근 열띠게 전개된 총리인준 청문절차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미국에서의 청문회 제도를 우리가 더욱 배워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도 수년전 미국에서 보크 판사의 대법원판사 임명을 두고 진보파 국회위원들의 공세로 좌절되는 것을 본 바 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삶을 도마대 위에 올려 놓고 공적(公的)으로 검증하고 평가하는 일이기 때문에 쉬울 듯 하면서도 막상 해보면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이다. 제도를 옮겨 놓는다하여 인간의 실체와 사회환경이 다른 나라에서 미국과 같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인간은, 더구나 공적 책임을 맡는 인간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람들의 주목과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청문회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새삼 전기(傳記) 내지 자서전의 문제를 생각하였다. 미국은 역사가 짧아서인지 인물의 전기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링컨에 대한 전기만도 백 종류가 넘는데 지금도 새로운 전기들이 출간되고 있다.
사실 나는 2년전부터 한국인물전기학회를 창립해 운영해오고 있다. 하와이대학에 있는 인물전기연구소에서 자극을 받아 창립하였는데, 그곳에서처럼 매주 모임은 가질 수 없고 월례모임을 갖고 있다. 매월 한 인물을 연구자에게 발표케 하고, 참석자들은 자유스럽게 질문하고 논평할 수 있도록 진행하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에 한 달은 한국인, 한 달은 외국인의 순서로 발표하고 있다. 문화인, 정치인, 경제인, 학자, 예술인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소박한 삶을 산 사람도 꼭 같이 고귀한 생명이라 연구대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전기와 자서전을 내는 데 인색하고 소극적인 면이 강하다. 내가 뭐 잘났다고 기록을 남기는가 하는 겸손 내지 자비(自卑)가 없지 않은 것 같다. 빈손으로 와서 흔적 없이 간다는 묘한 동양적 윤리의식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전혀 반대로 전기나 자서전을 작가에서 맡겨 미화시켜 내도 괜찮다는 생각도 팽배하고 있는 것 같다. 전기나 자서전을 너무 안 쓰는 것도 문제이고 너무 쉽게 내는 것도 문제라고 하겠다.
그래서 바른 전기와 자서전을 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마음가짐과 훈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전기학은 역사, 문학, 심리학의 종합이 이루어져야 제대로 형성된다. 여기에 일종의 사각지대와도 같은 전기학의 존재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한국에서 전기학이 어려운 이유는 흔히 지적하는 대로 후손과 종친회에서의 간섭과 공격이 두려워서라는 점도 있고, 현대사의 굴곡, 즉 친일 및 좌우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일생을 거론하기가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제 이러한 사슬도 어느 정도 풀리고, 나의 삶이 중요한만큼 남의 삶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져줄 여유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
청문회의 무대가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다. 결국 인생은 전기 속에서 최종적으로 정리되고 평가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삶의 스타일이 얼마나 민족적이고 얼마나 인류적인가 한국인의 전기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돌이켜볼 수 있다.
외국에 나가서 보면 한국인의 삶을 보여주는 전기사전 한권 영어로 된 것이 없다. 한국이 뭔가 뉴스가 많은 나라로 보이는데 정작 한국인은 보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가장 알려진 인물은 김일성과 문선명이다. 한국인도 각 분야에서 자기 보람을 느끼며, 민족과 인류의 양면으로 수준 높은 인간상으로 부각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만사는 모두 인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구가 기울여지지 않는다면 역사와 학문도 모두 허공에 뜬 것일 뿐이다. 모두가 떳떳한 전기와 자서전을 남길 수 있는 삶으로 성숙되어야 할 것이다. 참된 전기 한권은 호화분묘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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