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간데스크-망각없이 행복 없다지만...

망각은 신이 인간에 내린 큰 축복 중 하나이다.'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라는 니체의 말처럼 망각이 없다면 세상살이는 정말 고단할 것이다.

부모나 가족의 사별, 실연의 아픔, 입시에서의 쓰라린 실패, 배신, 증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상념에서 사라지지 않고 항상 머물고 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아마 정상적으로 가정이나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는 이는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무엇이든 잊어버리기를 곧잘 한다는 것도 분명 즐거움의 하나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당연히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지않고 꼭 잊지않아야 할 것은 쉽게 잊어버리니 문제다.

6월 한달, 전 국민을 열광케했던 월드컵 축구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축구 경기장은 물론 수십만명이 몰려 응원전을 폈던 거리에서도 응원단이 버린 쓰레기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언론도 '위대한 시민정신' 이라면서 추켜세웠다.

불과 한달이 조금 지난 지금, '위대한 시민정신'은 온데 간데 없고 사람들이 몰렸다 하면 버려진 쓰레기가 넘친다.

히딩크 신드롬도 마찬가지다. 히딩크가 단순히 축구감독이 아닌, 한국의 꿈을 이뤄준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되면서 우리 사회 각계 각층이 히딩크의 리더십을 배운다고 부산했다.

히딩크 리더십의 요체 중 하나는 정실·연고주의 배제다.

모든 사람이 자질과 능력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그러나 우리 사회가 알면서도 그동안 실천하지 못한 것을 그는 소신있게 실천했고, 이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존경받을만 했다.

문제는 정실·연고주의 배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가 히딩크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는데도 벌써 이를 잊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달중에 있을 대구시내 일부 공립고교의 교장 인사도 마찬가지이다.

대구시교육청은 이달말로 정년이 되는 경북고와 경대사대부고 등 3개 고교 교장의 후임을 내정하면서 학연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학교 출신이 모교의 교장이 되면 애교심을 갖고 더 열심히 하고, 동창회와의 관계도 무난해 학교로서는 득이 된다는 주장에서다.

그렇다면 다른 학교 출신이 교장으로 오면 애교심이 없어 열심히 일을 않는다는 말인가. 또 다른 학교 출신의 교장에 대해서는 동창회가 '동창이 아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교 발전을 위한 교장의 합리적인 노력에 사사건건 제동을 건다는 뜻인가.

모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교장의 직무를 소홀히 할 정도의 교육자라면 교장 직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도태됐어야 마땅하다. 또 동창회도 동창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교 발전을 위한 교장의 노력에 협조하기를 거부한다면 동창회 역시 경쟁력이 없다물론 여러명의 교장 후보를 놓고 검토해본바 그 학교 출신 교장의 능력이 가장 뛰어났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또 교장 후보의 능력이 모두 엇비슷해 그 학교 출신 교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하더라도 크게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교 경영 능력이 입증되지 않은 사람을 단지 그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교장에 앉히려 한다"거나 "교장 후보로 처음부터 다른 학교 출신은 배제, 그 학교 출신 2~3명만 고려됐다"면 이는 명백한 정실·연고주의이다.

게다가 특정 고교의 후임 교장 내정에 지역 출신 국회의원 모씨와 교육위원 모씨의 입김이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나도니 더욱 유감스러운 일이다.

학습효과를 가장 따지는 교육계가 정실·연고주의로는 안된다는 '히딩크 학습효과'를 불과 한달여만에 망각한다면 이 또한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교육도시라는 대구의 교육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정실·연고주의라는 낡은 구조로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월드컵을 통해 다시 한번 실감했다.

퇴계 선생은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본원이며 모범을 세우는 곳'이라 했다. 그렇다면 교육계가 더욱 앞장서 정실·연고주의의 때를 벗어야 한다.

이번 교장 인사가 주목받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상당수의 사립고교는 모교 출신에 대한 배려가 이미 거의 사라졌다. 모교 출신을 배려하는 관행이 경쟁력에는 별다른 도움이 안된다는 판단에서다.대구시교육청이 '히딩크 학습 효과'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기를 기대한다.

망각없이 행복은 있을 수 없다지만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너무 쉽게, 그리고 빨리 잊어버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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