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림이야기-권력자와 미술(1)

영화 취화선의 한 장면. 어명을 받고 궁중에서 산수화를 그리던 장승업은 술생각이 나 심야에 궁중 담을 넘어 달아난다. 요즘같으면 신문의 헤드라인 뉴스를 장식할 만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그 당시 화공(畵工)들은 궁궐에서 일하는 것을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여겼고, 감히 어명을 어기고 일탈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감히 꿈도 못 꿀 때였다.

방자한 행위를 문제삼아 신분낮은화공의 목을 친다 해도 누가 이의를 달겠는가.

영조때 조영석이라는 양반출신 화공의 얘기. 어진(御眞.임금의 초상화)제작에 참여하라는 어명을 받은 그는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나타내 조정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는 "사대부 출신인 내가 천한 화공들과 어떻게 함께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잔뜩 호기를 부렸지만, 결국 주위의 권유에 떠밀려 용안을 그린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장승업의 기행이나 조영석의 배짱보다는, 당시 권력자들의 관대한 태도에 주목한다.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던 임금이 민주주의를내건 요즘 권력자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예술을 아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도 대통령의 초상화나 청와대의 장식용 그림이 가끔씩 그려지는데, 얼마전만 해도 봉건사회보다 전혀 나을 게 없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곤 했다. '6공 말기 한 화가는 청와대로부터 신축공사중인 본관의 대형벽화 제작을 의뢰받았다. 한참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청와대 관계자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뜻이냐" "이 동물의 위치는 여기가 적당한 게 아니냐" "색깔이 너무 튀는 게 아니냐"…. 그는 숫제 붓을 맡기고 싶을 정도로지적사항이 많은 탓에 손을 털 생각까지 했다. 나중에는 "대가들도 청와대가 나서면 공짜로 그림을 주는데 당신은 무슨 배짱으로 제작비를 비싸게 받느냐" "큰 일을 맡겼으니 나중에 그림을 하나 그려주겠느냐"는 얘기까지 예사로 나왔다'〈손철주의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지난 97년 김영삼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린 서양화가 이원희(계명대 교수)씨의 경험담. "청와대로부터 초상화 제작을 의뢰받았는데 YS사진을 내놓고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요구했어요. 처음에는 기가 차 말이 안나오더군요. 모델을 보기 전에는 절대 초상화를 그릴 수 없다고 우겨 YS와 겨우 30분을 독대할 수 있었죠".

이제는 물론 그렇지 않겠지만, 얼마전만 해도 예술을 바라보는 권력자들의 시각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상식있는 사회'라는 말이 나왔나보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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