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전된 총처럼 긴장감이 가볍게 스친다. 기우뚱거리는 듯 곧 균형을 잡아 앞으로 나아간다. 신천변까지 자동차에 실려왔던 자전거를 집에서부터 타고 온 것이다. 그리 멀지않은 이곳까지 거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도로로 나서니 당혹감에 자전거가 계륵(鷄肋)이다.
횡단보도에서는 아예 내려서 '애마'를 모시고 갔다. 죽은 자전거를 살려내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올라탄 채 부딪쳐 넘어지는 것보다 낫다. 세상을 초심으로만 살아간다면, 사랑이나 부, 명예처럼 무엇엔가에 익숙해 있을 때 초심을 돌아볼 수 있다면 삶의 오류는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신천변을 따라 달린다. 삽상한 바람이 이마에 부딪혀 머리카락을 기분좋게 쓸어간다. 둔치밑을 흐르는 이 물은 어디서부터 흐르기 시작했을까. 어드멘가 작은 물길들이 모여 예까지 왔고 또, 강을 만나면 거기에 편입될 것이다. 강들이 다다를 곳은 필경은 바다인지라 웅숭깊은 바다는 품을 넉넉히 하고 그들을 기다린다.
목적지가 분명하니 물은 이처럼 걱정이 없다. 그래서 정직하게 흐른다. 내를 만나면 내의 깊이로, 강을 만나면 강의 깊이로. 그저 무심히 흐르기만 한다. 깊이를 속이려 들지 않는다. 사람들처럼.
---골목길 누비는 세상 구경
자전거 타기는 걷기의 또 다른 형태이다. 두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수공업적 운행이다. 그리하여 매연도 소음도 없다. 덩치라곤 없으니 골목길도 시장바닥도 헤젓고 다닐 수 있다.
저자거리엔 인도 부근까지 노점상들이 북적댄다. 푸성귀 한 웅큼 과일 한 바구니를 앞에 놓고 종일을 앉아 있었나보다. 희미한 햇살은 빚진 아비같이 까만 어깨에 비끼듯 걸려 있다. 목판 위의 삶이 후련하여 한 무더기 사서 뒷자리에 묶는다.
골목길로 접어든다. 언감생심, 숨바꼭질하던, 자치기 딱지치기가 우리의 키를 키워주던, 이야기가 있는 골목까지야. 그래도 고만고만한 집들이 소복하기만 하여도 좋으련만. 낡은 집들이 헐리더니 멀쩡한 주택들도 원룸형 건물로 바뀐다. 정원에 있던 그 많던 나무들도 자취도 없다. 어디선가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있는가. 이제 이 동네에서 남은 초록이란 몇 집의 정원수와 가로수밖에 없다. 세월은 '돈'이 된다고 자꾸 부추긴다.
외곽으로 나오니 눈이 씻기우고 맑은 공기가 폐부까지 와 닿는다. 저기 오르막이 보인다. 힘을 덜어 주는 것이 탈 것인데 비탈오르기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 걷기보다 훨씬 힘든다. 그래도 경사 초입에 이르기 전부터 부지런히 발을 움직여 힘을 비축하면 무난히 오를 수 있다.
인생도 이러하다면 얼마나 좋으랴. 고갯길이 눈 앞에 훤히 보인다면 그래서 예비할 수 있다면. 힘들여 올라온 보상으로 내리막을 만나 페달을 놓아도 좋다. 저절로 구르는 바퀴 위에서 잠시 편안하다. 자동차가 우리를 추월하여 빨리 달아난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는가.
---인생도 고갯길 보이면…
에부수수한 관목들 사이로 들꽃이 곱다. 너는 보라색을, 너는 붉은 꽃을 피우라고 햇살은 훈수를 둔다. 우리는 모두 자연의 상속자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나 인간의 그것은 그들을 훼손한다. 매연도 소음도 없이 폐를 끼치지 않아 오늘은 미안할 것이 없다.
잠시 땀을 훔치며 쉬는 자전거가 있는 풍경. 네개의 둥근 바퀴가 햇살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이다. 온갖 빛깔은 꽃들에 내려앉고 바람은 살갑다. 일희일비하는 일상과의 잠시 결별이다. '깡통따개의 법칙'이란 중심에서 가장 먼 가장자리를 돌리는 것이 깡통을 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문득 인생의 암호 하나를 푼다. 세상 사람들에겐 이미 상식이 되어 낡은 것일지라도. 오늘을 즐거워 할 것이다. 저 너머 그 너머를 궁금해 하지 말 일이다. 꽃봉오리의 목표가 열매만이 아니라 꽃이라는 아름다운 과정이 있듯이.
내일에 대한 복잡한 설계는 근원적으로 탐심에서 온다. 은륜 위에서 나는 백자처럼 하얗게 비운다. 문양도 없이, 색채도 없이. 사방이 트여진 이곳에서 빈자의 땅, 인도로 가는 사람들처럼 빈 가슴이 된다. 저기 먼지나는 도시의 초입에서부터 세상의 풍진으로 가득 채워지더라도.
남영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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