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비-(6) 재조명되는 기학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중세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난제는 불평등에 기초한 봉건적 계급체계와 빈곤문제였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귀족과 평민, 양반과 상민으로 나눠지고 이에따라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구분돼 절대다수의 백성들이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회구조는 극복돼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 4대문명권의 지식인들이 중세체제를 부정하며 기존 지배계급에 대항해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고자 하고 근대화의 길로나아간 것은 잘 한 일이며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근대의 모순을 극복, 근대 다음의 새로운 21세기를 열기위해 중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중세에 대한 근대인들의 평가가 정당하기만 했던가 하는 반성이 각 방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특히 역사학 분야에서는 근대인들이 승리감에 도취해 중세기를 사실과 다르게 일방적으로 폄하해 온 면이 적지않아 중세사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 역시 부당하게 폄하 돼 온 점이 없지않아 보인다. 우리는 지금껏 양반계층인 선비들이 사회적으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며음풍농월이나 하고 지냈던 존재로 낮춰보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해방후 무비판적 서구문물의 수입 영향으로 우리의 주체적 시각에서 우리의 중세기를 제대로 연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조선시대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조선시대 선비들은 다른 문명권 지식인들 이상으로 시대적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려 한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선 각 시대 사회변천에 따라 우리의 유학사상의 강조점이 달라져 온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유학을 국가통치 이념으로 수용한 조선건국 초기와 중기의 도학(道學)선비들은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에 힘쓸 것을 일차적 과업으로 삼았다.

도학선비들은 스스로 깨달아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면서 행실을 가다듬지 않고 세상에 나가 명리를 구하는 것(爲人之學)은 용납할 수 없다며 마땅히 알아야 할 도리를 깨달아 몸소 실천해 학행(學行)을 일치시키도록(爲己之學)해야 한다고 했다.

이 시대 선비들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해 바른 마음인 인·의·예·지 사단(四端)이 이발(理發)인지 기발(氣發)인지를 따지고, 심성(心性)과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인 것도 어떻게 하면 세상의 인심을 바로잡아 백성들이 두루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할까 하는 고민의 산물이었다.

도학선비들에 이어 실학(實學)선비들이 등장했다. 실학선비들은 봉건체제가 해체되는 급박한 사상 전환기에 옛글의 글자나 풀이하고 예의를 따지는 것으로는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살아가는데 유익한 학문을 할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서얼철폐 반상계급철폐 등 사회개혁과 함께 농업 상업 공업을 장려할 것을 역설하고, 당시 적대시 하던 청나라의 앞선 과학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이들 실학선비들은 전시대 도학선비들이 정덕(正德)을 먼저 이뤄야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이 가능하다고 한 것과는 거꾸로 이용을 이룬 다음에 후생을 할 수 있고 후생을 이룬다음 정덕을 할 수 있다고 말해 유학의 가치기준을 명분론적 의리론에서 실질적 효용론으로 전환시켰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힘쓰는 도학선비와 세상을 유익하게 하고자 하는 실학선비들이 양립하고 있는 가운데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탐구, 그 둘이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될 수 있게 하는데 힘쓰는 기학(氣學)선비들이 있었다.

15세기 서경덕에 이어서 임성주와 홍대용을 거쳐 19세기초 최한기에 이르러 완성된 조선기학의 핵심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입장에서 세상만사를 총괄해 이해함으로써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근거한 귀천(貴賤) 화이(華夷) 천지(天地)의 차등론을 불식하고 세상을 유익하게 하고자 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까지 수용하는 것이었다.

이들 기학선비들은 도교나 불교의 학문을 허무학, 마음을 바르게 하는 성(誠)과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실(實)을 내세우는 정통유학을 성실학이라 일컫고 성실학이 허무학보다는 나을지라도 시대에 맞지않는 무리한 전제를 불변의 이념으로 내세우는 폐단을 비판했다.

그리고 성(誠)에 치우친 성리학의 폐단에서 벗어난 실학이라도 보편성이 결여된 일향일국(一鄕一國)에 그쳐 경우에 따라 유용할 수도 있고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최한기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기학을 천인기화(天人氣化)의 진실을 밝혀 동서의 마찰을 해결하고 천하만세공공(天下萬世公共)을 감복시키는 총괄학문이라고 자부했다.

우리의 유학담론은 도학 실학 기학 세가지 가운데 주로 도학과 실학에 중점을 두고 전개해 왔다. 성리학을 국가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비주류인 기학을 적대시 해 온 전통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양의 물질문명에 대처하는 처방으로 도학선비의 정신문화를 내세우고, 우리에게도 실학의 전통이 있었음을 자랑해 왔다.

그러나 동·서양문화 비교연구가 심화되면서 유럽문명권은 물론 이슬람문명권에서도 중세기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이 우리 못지않게 철저했음이 드러나면서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님이 밝혀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실학은 서양의 과학기술이 이미 그 임무를 떠맡아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어 자랑거리로 내세울바가 못된다.

우리는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의 전통문화 가운데 비주류로 달갑잖게 여겨왔던 기학을 새로운 원천으로 이어받아 가꾸어야 한다. 그래야 유럽문명권의 세계제패 때문에 문명권의 대등한 관계가 무너지고 환경이 파괴되며, 절대적 빈곤이 해결된 반면 상대적 빈곤이 다시 문제가 되는 근대의 모순을 비판하고 제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도학이나 실학선비들의 전통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유학의 범위를 기학으로 까지 확대해 서양문명권의 횡포에 맞서자는 것이다.

조동일 교수는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머리말에서 "기철학은 이기철학을 그 내부에서 혁신해 이룩한 생극론을 통해 근대를 넘어서서 다음시대로 나아가는 세계사 전환의 지침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최종성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