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평양에서만 개최됐던 8·15남북공동행사가 올해 처음으로 서울에서 개최된 것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 진전의 결실이다.
'범민족대회'로 치러지던 90년대 말까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과 전국연합 대표자들이 평양으로 밀입북하고 보안당국은 귀환자를 구속 처벌하는 상황이 계속됐고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부터 비로소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졌다.
8·15남북공동행사와 관련해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남북한 양쪽에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가 생겨나면서부터이다.
북측은 이해 6월 민족화해협의회를 결성했고 남측도 이즈음부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를 설립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져 같은 해 9월 정식 결성됐다.
모처럼 평양 밀입북 없이 남북이 공동으로 8·15행사를 치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비록 공동행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 해 6월16일 세기적 이벤트로 기억될 '소몰이 방북'이 성사됐고 같은해 11월18일 금강산관광사업이 시작된 것은 남북간 해빙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을 입증했다.
이런 분위기는 1999년으로 이어져 5월말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남북 차관급회담이 이뤄졌고 남북간 사상 처음으로 노동자축구대회(8.12-14)를 준비하는 등 화해와 협력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중국 베이징(北京)을 무대로 남북 민간 대표들이 김구 선생 추모모임과 문익환 목사 회고모임을 기획하는 등 남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서울 또는 평양을 막론하고 8·15공동행사를 치를 만큼 남북관계가 좋지만은 않았다.
99년 6월15일 서해 교전사태가 벌어졌고 이에 앞서 한총련은 6월1일 또다시 평양 8·15통일축전에 연세대 휴학생 황혜로씨를 파견했고 서울대학 교정에서 대회를 진행했던 99 범민족대회추진본부 대변인 박해전(당시 47) 한겨레신문 기자가 수배돼 2001년 2월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당시 한총련은 "조국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북으로 갈 것"이라며 앞으로도 계속 학생 대표를 북한에 보낼 것임을 분명히했고 민간 통일운동진영과 정부 당국과의 대립관계도 살얼음을 걷는 듯 했다.
그러나 1999년 9월 '페리보고서' 발표와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해제 및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잠정 중단 선언을 기점으로 북·미 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면서 한반도정세는 급변했고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때부터 북측은 한총련 대표의 밀입북을 사절했고 한총련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남북간 민간 차원의 대화는 노동자대토론회와 체육대회 및 농민행사 등 분야별 공동행사로 한 단계 높아진다.
남측 민간통일운동의 대표 격으로 모두 네 차례 옥고를 치렀던 김양무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수석부의장이 2000년 1월26일 암투병 끝에 사망한 것도 당시 정세 변화를 상징하는 한 사건이었다.
2000년 8·15 때는 남북이산가족 방문단을 교환함으로써 북한은 특별한 행사대신 '북남공동선언을 지지 환영하는 정부·정당·단체 연합대회'를 개최하는 등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전환됐다.
이같은 분위기 반전에 힘입어 지난해에는 남측 당국의 허가아래 8·15 남측공동행사 남측대표단(단장 김종수 신부) 337명이 평양을 방문, 통일대축전에 참석했고 마침내 올해 역사적인 서울행사를 치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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