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고향을 등지고 먼 이국땅에서 함께 피를 흘린 동지들 모습에 밤잠을 설치곤 하지…". 광복이야기도 채 꺼내기 전에 목이 멘다.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핍박받던 지난 1934년, 17세의 나이로 고향선배와 함께 먼 중국땅으로 건너간 홍재원(85.대구시 달서구 상인2동) 할아버지.
만주를 거쳐 난징, 상하이 등지를 전전하며 나라 잃은 설움에 괴로워 하던 홍 할아버지는 중국군 시안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1년 당시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던 광복군 제2지대에 들어가면서 고난의 항일 투쟁사가 시작됐다.
"일본군들과의 수차례 전투에서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겼어. 그때는 동지들 모두가 싸움에 지면 고향에 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죽기살기로 싸웠지".
4년이 지나 해방이 되면서 고향인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으로 돌아온 홍 할아버지는 또다시 고향을 등져야 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고향이 당시 38선 이북에 위치,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1년만에 남으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후 육군 대위로 임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난 61년 예편할 때까지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줄곧 근무했다.
반평생을 항일독립운동과 군에서 보냈지만 사회는 냉담하기만 했다. 사회적응에 실패, 수없이 쓴잔을 맛본 홍 할아버지는 지난 83년 무일푼으로 대구에 왔다.
월세 단칸방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던 끝에 90년 독립투사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애족장을 받으면서 겨우 15평 영구 임대아파트를 마련하게 됐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오히려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애국지사들을 모두 찾아내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홍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다.
"우리나라는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친 사람들에게 너무 인색한 것 같아. 나 말고도 어렵게 생활하다 돌아가신 광복군 동지들이 많이 있었어". 홍 할아버지는 "국가가 잘 돼야 국민이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을 모든 사람들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대구에는 현재 15명의 애국지사가 살고 있으며 광복군 출신은 홍 할아버지를 포함 2명이 생존해 있다.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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