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과거 청산 계속돼야 한다

광복 57주년을 맞아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5개 단체가 그저께 이광수 등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선배 문인들의 과오를 사죄한다는 내용의 '문학인선언'을 낭독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명단 속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몇몇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망스러웠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3·1 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 중 끝까지 지조를 지킨 분은 많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일제의 압박 하에 있던 우리민족의 설움과 한을 노래했다는 '봉선화'의 작곡가 홍난파의 친일행각도 언론매체를 통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에 더 상처를 입힌 것은 해방 후 민족적 과제였던 친일파 청산이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민족의식이 약해서 그렇게 많은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친일을 했고, 또 우리의 민족의식이 남보다 못해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가?

학회에서 만난 한 원로학자는 을사조약 전후의 항일 의병투쟁에 대해 신분이나 계층을 막론하고 각계 각층이 의병투쟁에 참여했다고는 하나 연인원(延人員)으로 보아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한 사람이 여러 전투에 가담한 것을 감안하면 실제 참가자수는 훨씬 적다고 하며, 그 당시 민족의식의 부족을 개탄하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신돌석, 김민수, 홍범도 등 수많은 평민출신 의병장의 존재와 대부분의 의병들이 평민이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는 내부적으로는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봉건적 신분제가 철폐되고, '모두 함께 우리'라는 연대의식을 필요로 한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다고는 해도 사회적으로 여전히 잔존하는 신분제 속에서 평민들이 그 만큼 의병투쟁에 참여했으면 오히려 많다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민족의식이 다른 나라의 그것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식민지 경험을 가진 아시아·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나라 중 독립 후 식민잔재 청산을 그나마 했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북한, 중국, 베트남의 세 경우밖에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세 가지 경우 모두 기존의 지배적 질서와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체제가 들어선 경우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흔히 드는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단은 민족반역자 처벌이기는 하나 식민지 경험을 거친 후 독립한 경우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의 '역사바로세우기'가 성공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왜 과거 청산에 실패했는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북한, 중국, 베트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경우에도 기존의 세력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대안적 정치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미군정이 권력을 장악하여 많은 친일파들이 중용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경우라면, 프랑스에서는 비시 정권을 무효라고 선언한 드골의 망명정부가 독일의 패전 후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다르다. 또 하나의 차이는 일제의 지배가 35년 동안이나 지속된 데 비해, 프랑스의 피점령기간은 단 4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4년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민족반역자 행위에 연루되어 150∼200만 명이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4년에 비해 35년은 엄청나게 긴 시간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일제 초기에 민족의식을 내세우던 많은 지식인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절한 것을 인간적 측면에서 이해는 할 수 있으리라 본다.

과거청산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청산을 못한 이유가 우리의 민족의식이 남보다 못해서여서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민족의식이 그토록 강하기 때문에 지금도 과거청산을 논하고 있는 것이리라.대한민국이 '요 모양 요 꼴'인 것은 해방 후 친일세력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만큼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가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광복 57돌, 이 강한 민족의식을 제대로 활용하여 '우리 모두가 더 잘사는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정준표(영남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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