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비-(7)사대주의자 비난은 부당

오늘날에도 우리들은 조선의 선비들을 사대주의자들이라고 혹평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 근거로 흔히들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중국 우선 유학의 사상체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중국문화의 모방에 급급하고, 정치적으로도 중국의 억압에 굴종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실례로 든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조선의 선비들을 사대주의자들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근대인들이 중세의 실상을 잘못 이해하거나 왜곡한데서 오는 부당한 편견 때문으로 밝혀지고 있다. 조선의 선비들을 사대주의자들로 규정하는 상식적 논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두가지가 가장 두드러진다.

조선의 선비들은 중국의 황제가 조선왕을 책봉(冊封)하는데 대해 거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기적으로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하는 굴욕적 외교관계를 지속시켰다는 것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훈민정음 같은 쉬운 우리말을 만들어 놓고도 모화(慕華)사상에 젖어 한문쓰기를 고집해 민족의 정신을 오도케 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 내면에 이 같은 사고가 못박힌 것은 일제때 우리의 지식인들이 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가 조선이 중국과 사대(事大) 관계를 가져 자주국가로 행세할 수 없었던 데 있다고 보아, 망국의 한을 유학의 탓으로 돌린 데도 원인이 있지만 더 큰 이유는 한국사의 주체성을 부정하며 종속성을 강조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있었다.

특히 일제는 책봉체제와 관련 일본은 중국과 사대관계를 일찍 청산하고 자주국가가 된 반면 조선은 공허한 관념일 뿐인 유학을 숭상함으로써 중국에 종속된 탓에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사의 일관된 특징이며 한국인의 민족성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해방후에도 책봉체제 연구를 동아시아 전체로 범위를 넓혀 가면서 일본은 책봉관계에서 다른 나라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으며, 또 책봉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고 자랑해 한국의 사대주의를 은연중에 부각시켜 왔다.

이에대한 한국사학계의 대응은 책봉과 조공제도는 '굴욕적인 것'이라 말해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부정적인 측면이 있더라도 대등한 입장의 일반외교'라고 부분적으로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오다, 최근에서야 '책봉체제에의 편입은 국가 주체성과 관계가 없다'고 하는 소극적 반응을 나타내 미흡한 면이 없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책봉체제 연구를 동아시아의 범위에서만 하지않고 중세기 4대문명권(유교문명권 힌두교·불교문명권 이슬람문명권 동·서기독교문명권) 전체로 확대하고 이를 비교분석한 결과 책봉체제는 중세기 4대문명권 모두가 똑같이 행한 제도였으며, 책봉을 받으면 주권이 약화되거나 부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책봉을 받아야 주권이 공인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책봉체제에 대한 긍·부정론이나 우월성 시비를 무의미한 것으로 잠재우게 됐다.

조동일 교수의 책봉체제연구('중세문학의 재인식-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에 따르면 책봉체제는 하늘의 뜻을 대신하는 각 문명권 전체의 종교적 수장인 천자(天子·유교문명권) 차크라바르틴(힌두·불교문명권) 칼리파(이슬람문명권) 총대주교(기독문명권)가 세속의 통치자에게 문서·의관·휘장·인장 등의 징표를 전하며 문명권의 전체 또는 일부지역을 다스리는 지위를 공인하는 행위로, 중세인들은 이를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마땅한 방도로 생각하고 큰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유엔(UN)에 가입해야 주권국가로 인정받는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또 책봉에 수반되는 조공에 있어서도 책봉을 받는 쪽이 조공을 하면 책봉을 하는 쪽이 답례를 하는 형식은 불평등 했어도 교역내용은 원칙적으로 대등해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나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책봉을 하는 쪽에서 과도한 조공을 요구해 책봉을 받는 쪽에서 고통을 받는 사례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당나라는 책봉을 받은 위글의 왕이 조공보다 더 많은 이익을 거둬가 당나라쪽에서 책봉관계를 파기하고 전쟁을 벌여야 했으며, 유구(琉球)는 명나라에 사신을 가장 많이 파견하는 특권을 얻은 후부터 무역국으로 나라가 부강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책봉체제가 무력의 강약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형태도 아니었다. 월남의 여조(黎朝)는 명나라의 침략을 물리쳐 민족의 독립을 되찾았으나 책봉체제를 거부하지 않고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다.

러시아도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라의 힘도 비잔틴보다 못하지 않았어도 비잔틴황제의 책봉을 받았다. 책봉을 받지않으면 보편종교를 믿지않는 불신자이거나 부당하게 권력을 장악한 찬탈자로 여겨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봉체제는 문명권중심시대 중세시기에 있었던 일로 고대에는 없었다. 보편종교 공동문어와 함께 중세문명권을 하나로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핵심사항이었다. 지금에 와서 책봉체제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보편종교 공동문어 책봉체제 가운데 책봉체제가 가장 철저하게 청산되면서 근대가 시작된 것은 되돌릴 수가 없다.

그러나 문명권 전체의 유대를 공고하게 하는 과업을 문화나 경제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이룩하려 할때는 책봉체제 속에서의 상호관계를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책봉하는 나라와 책봉받는 나라의 구분을 다시 할수는 없겠지만 책봉받는 나라들 끼리의 대등한 관계는 오늘날의 배타적 주권을 넘어서서 새로운 국제관계를 마련하고자 할때 소중한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범아랍민족주의가 그 길을 찾고있는 것은 오래된 일이며 유럽통합은 더 늦게 시작되었으나 더욱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만이 책봉체제를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기 위한 체제라고 규탄하고 우월시비나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조동일교수의 결론이다.

조동일 교수는 "근대가 시작되면서 중세의 책봉체제를 청산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근대의 공적일 수 있다. 그러나 중세문명권의 동질성마저 부인하는 것은 손실이다"고 지적하고 "여러 문명권의 중세인이 일제히 만들어 낸 책봉체제를 근대인의 시각으로 일방적으로 평가해서 열등감 또는 우월감을 느끼는데 이용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주장했다.

최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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