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림이야기-(3)권력자와 미술

얼마전만 해도 신년이 되면 대통령의 휘호(揮毫:붓을 휘둘러 글씨를 씀)가 신문지면을 곧잘 장식하곤 했다. 대통령이 심심찮게 현판을 쓰거나 휘호를 써 아랫사람이나 단체에 내려줬고, 유력인사들은 가문의 영예(?)를 드높이기 위해 대통령의 휘호를 구하러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시절이었다.

이때 정작 마음고생을 한 것은 서예인들이 아닐까. 한 원로 서예인은 "시절이 시절인 만큼, 드러내 놓고 얘기는 못했지만 '눈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하기야 아마추어의 솜씨가 '애교'수준이 아니라, 명필인 것처럼 대접받았으니 얼마나 분통 터질 노릇인가.

박정희 전대통령이 광화문 서액을 직접 쓰고 현판식을 열던 날의 일화. '유명 서예가이자 국회의원인 모씨가 그 자리에 참석했다 현판 글씨를 보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니 어느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나". 질겁한 동료 의원들이 그를 제지하며 눈짓으로 대통령을 가리켰다. 그는 재치있는 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오히려 더 큰소리로 "이 사람아,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있는 글 아냐?"

그래도 이승만.박정희 전대통령은 꽤 수준 높은 글씨를 보여준 이들로 평가된다. 이승만 전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유학을 공부한 명문출신답게 역대 대통령 중 최고 명필로 꼽힌다.

능란한 기교가 넘치는 달필을 자랑했고, 영주 부석사 현판을 비롯,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현판과 비문을 썼다. 넉넉하고 유려한 글씨체를 보면 독재자로 군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평가와 간드러진 기교 속에 독선과 음모가 숨어있다는 평가로 엇갈리는 것도 흥미롭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풍운아 다운 힘있는 글씨를 쓴 것으로 이름높다. 글을 각지게 뚜벅 뚜벅 써나가는 강직한 글씨체가 특징. 일부에서는 "글씨에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살기까지 비친다"며 '사령관체'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 시절 배운 글씨에 서예가 소전 손재형의 지도를 받아 독특한 서법을 구사했다. 박전대통령의 글씨는 지금도 전국의 명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광화문, 충남 아산 현충사, 제주도 5.16도로, 고리 원자력발전소 기념탑 등 수십곳에 이른다.

그래도 이들 두 대통령의 경우는 나름의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훨씬 나은 편이다. 그뒤 전두환 전대통령부터 대통령의 휘호가 다소 코믹한 양상으로 흘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얘기는 다음주로 미룬다)

관서지인(觀書知人)이라는 말이 있다.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뜻이다. 권력자들의 사례를 보면서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음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할까.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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