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생활속의 문화-(9)만화

"만화, 예술 혹은 천덕꾸러기".

시사만화가 박재동씨는 그의 책 '만화 내사랑'을 통해 당시의 '만화빵'(만화방)을 추억한다. "'만소잡 화설지'라는 만화빵 창문의 글이 '만화 소설 잡지'를 가리킨다는 걸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만화빵이었지만, 내 유년의 상상을 살찌우는 낙원이었다".

잡지는 물론 애니메이션, 캐릭터, 각종 홍보용 책자에 빠지지 않는 만화. 영상.게임 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떠오른 만화는 단연 우리 생활속에 빠지지 않는 출판예술이다.

그러나 만화에서 상업성은 떠올려도 문화적 가치와 쉽게 연관짓지 못하는 것은 '문화=고상함'이라는 고정관념 탓이다.문화를 '동시대인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트렌드'로 정의내린다면 만화만큼 시류에 재빠른 것도 드물다. 이것이 요즘 만화를 다시 봐야하는 이유다.

#'만화빵'과 '만화대여점'

'만화빵 문 유리에는 검정색 고무줄이 책들을 받치고 있었다. 큰 것은 50원, 작은것은 30원. 100원어치 만화책을 보면, 외팔이 무사가 나오는 비디오를 공짜로 볼 수 있었다.

만화빵 영감은 늘 가래가 곧 죽을 듯이 끓었는데, 곰팡내나는 침침한 만화빵의 조그만 난로에선 늘 무엇인가 끓고 있었다. 정신없이 책에 빠질라치면 미닫이 문이 박살나듯 열리며 엄마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던 어린놈도 있었다. '학교앞 불량업소 출입하지 맙시다'란 주제로 만화빵에 벌건 가위표를 칠한 그림을 숙제로 내던 때였다'.

요즘엔 만화대여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출판만화의 쇠락이 만화대여점의 등장 때문이라는 데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만화는 사서 봐야지, 빌려보는 것이 아니다"는 논리는 옳지않다. 유희를 값싸게 즐기고자하는 욕망은 영악한 것이 아니다. 영원히 소장하고 싶은 만화를 그려내는 것은 만화가의 몫이다.

#순정만화.엽기만화

21세기는 '호모섹슈얼리티', 중성의 시대. 연하의 미소년에 대한 열광도 이것과 같다. 사회는 점점 메말라가지만, 현대인은 더욱 필사적으로 감수성에 목말라한다.

"요즘 만화는 정말 감각적이에요. 직접적인 감정표현보다 부드럽게 감정을 우회해 표현하는 기술이 점점 발달하는 것 같아요. 만화가 문화적 유행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어요". 대구.경북 아마추어 만화협회 김수희 회장(26)의 말이다.

만화동아리의 축제현장에서 만난 한 남자 고등학생은 스스로 순정만화예찬론자라고 했다. "유치하지 않기 때문"이란 말 속에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경쟁에서 승리한 '남성성'의 강요에 지친 남자들이 순정만화에 빠지는 것이란 추측을 해본다. 21세기 청소년들은 춥고 배고픔을 참아야하는 '공포의 외인구단'에 더이상 열광하지 않는다.

소녀는 더이상 '순정'을 믿지않게 됐다. 이는 만화 속 여자캐릭터의 변화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착한 여자를 둘러싼 여러 능력 있는 남자와 그녀를 괴롭히는 악녀간의 긴장관계는 여전하지만, 착한 여자는 이제 더이상 뒤돌아서 울지 않는다. #'팬픽(fanfic)'현상과 '야오이'만화

'팬픽'(fanfic)은 '팬'(fan)과 소설, 허구를 의미하는 '픽션'(fiction)의 합성어. 주로 여중생이나 여고생이 동경하는 가수, 배우, 스포츠스타 등 실제인물을 등장시켜 만들어가는 소설형식의 글이다.

만화동아리의 한 여고생은 "좋아하는 스타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창조해가는 쾌감이 있다"며 "(내가)쓴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이를 다시 종이로 출력해 반 친구들과 돌려볼 정도로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H.O.T 팬픽'이나 'GOD팬픽'등을 '자작소설'이라는 이름 하에 쉽게 접할 수 있다.

팬픽의 또 하나 큰 특징은 남성간의 '동성애'를 다룬다는 데 있다. '이반'이 여고생들 사이에 한동안 얘기거리로 떠올랐는데, 이런 팬픽이나 이반은 소위 '야오이 만화'가 끼친 영향력이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야오이'는 일본어로 '야마나시'(절정없음), '오찌나시(완결없음)', '이미나시(의미없음)'세 단어의 앞 글자만을 딴 말로, 남자끼리의 성애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미소년 동성애 만화'를 총칭한다. 물론 저급성도 포함돼야한다. 경찰과 게이의 사랑을 그린 만화 '뉴욕뉴욕'은 그와 반대의 이유로 야오이가 아니다.

야오이에서는 '슬램덩크'나 '바람의 검심' 등의 남자 주인공들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컷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국이 선전한 지난 월드컵땐 일본의 여성축구팬들이 한국축구선수들을 주인공으로 한 팬픽을 만들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만화비평가들은 이에 대해 "소년들이 음란물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유로 소녀들이 미소년들의 적나라한 성애를 다룬 '아오이'에 열광하고 있다. 팬픽에 열광하는 일부 소녀들은 야오이의 주인공이 되고싶어 하기도 한다"며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의 아오이는 비교적 '호기심'수준의 단계"라고 분석하고 있다.

#만화 아마추어동아리

요즘 만화를 배우고 싶은 이들은 예전처럼 기성 작가의 화실에서 더이상 '삼고초려'할 필요가 없다. 최근 온, 오프라인에서 일어나는 만화동아리 붐은 취미수준에서부터 만화산업을 걱정하고, 비평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해있다.

대구.경북 아마추어 만화협회(회장 김수희)도 그 한 예. 지난해 1월 결성된 협회는'대만연'과 'COPE' 'UCCA' 등 대구.경북 만화동아리를 하나로 묶은 연합기구로써 그 산하에는 또다시 개별동아리들이 활동중이다.

"개별 동아리로는 작품전시 행사 규모도 제약이 많아 동아리간 교류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지난 해 8월 처음 시도한 이래 벌써 4회째에 접어든 대구.경북 만화축제 'CAFE'(CArtoon FEstival). 이번에는 지난 주말 중구 밀리오레에서 회원들의 캐릭터 작품 70여점을 전시했다.

회원들은 만화가 아직도 '천덕꾸러기'에서 못 벗어났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해 여름 'YWCA 주최 만화공모전'에서 입상한 백진화(17.고2)양은 "상 탔을 땐 학교의 명예라며 추켜세우던 선생님이 동아리 홍보요청을 학교에 부탁했을 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며 섭섭해했다.

협회장인 김수희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만화가를 꿈꾸는 '만화 키드'(Kid)다.만화에 대한 김씨의 말에 여운이 든다. "몇백년 전 유럽에서 컷으로 나눠진 그림을 연결한 '만화적 양식'(당시에는 이야기 그림)이 처음 등장했을때는 강력한 전달력 때문에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가져왔대요. 그런데 누구든 쉽게 볼 수 있다는 장르적 매력이 상업성과 만나면서 저급해졌대요. 만화의 운명이 참 아이러니하죠?"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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