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글귀는 뭘까? 대도무문(大道無門)이 아닐까. 그는 붓을 잡았다 하면 줄기차게 '대도무문'만 썼다.
그가 5공시절 자신의 좌우명을 쓰고, 또 쓰면서 마음을 다잡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상도동에서 고난에 찬 연금생활을 하면서 YS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붓을 쥐는 일이었다고 한다.
'대도무문'이라는 글 하나에 김 전대통령의 역정과 뚝심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YS의 서예선생이 평생 용(龍)자 하나만 써온 창해 김창환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김대중 대통령도 YS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숨은 실력자다. 야당총재시절 호남의 유력인사들이 그의 글을 받으러 뛰어다녔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예전 대통령들마냥 휘호를 자주 쓰는 것은 아니지만 1년에 몇차례 정도는 공개적으로 실력을 보여준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 쓴 '경세제민(經世濟民)', 중앙인사위원장 집무실에 걸린 '입현무방(立賢無方.인재를 등용하되 지역을 가리지 말라)', 민주당 당사와 의원회관에 걸린 '새천년의 꿈' 등이 있다.
DJ는 선생을 두고 배운 것이 아니라 순전히 독학으로 서예를 익혔다고 한다. 자기중심적인 그의 성격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글 솜씨는 논할 정도가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서예가들이 '초급자 수준'이라며 언급을 회피할 정도였다. 두 전직 대통령도 가끔 붓을 쥐었고 현판도 여럿 남겼지만,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처지는 솜씨를 보여줬다. 아마 직업 정치인의 길을 걸어오지 않은 탓에 서예에 몰두할 시간이 부족했으리라.
굳이 두사람의 우열을 따지자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훨씬 낫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재직시절 중견서예가의 지도를 받았지만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전 대통령은 구양순의 비문을 보면서 글씨를 익혔고 원로 서예가가 붓을 잡아주는 등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구양순 체(體)인지 안진경 체인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게 서예인들의 얘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해 대구공고 동문회에 '부귀길상 백사여의(富貴吉祥 百事如意)'라는 신년휘호를 써 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차기 대통령 자리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이회창.노무현씨는 어떨까. 두사람 모두 휘호를 써 본 적도 없고, 앞으로 쓸 일도 없다고 말한다.
사상 처음으로 휘호를 쓰지 않는 대통령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정치인들이 휘호를 쓰면서 '꿈'을 키우던 낭만도 함께 폐기처분되지나 않을까.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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