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비-(9) 투철한 항일 독립정신

을사보호조약(1905년)에 이어 경술합병(1910년)으로 나라를 잃게 된 일제강점기 유학선비들의 항일독립운동역시 당시 개화사상가들의 활동에 가려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면이 적지않다는 지적이다. 경술합병과 8·15 해방 사이 유학선비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그 이유로 첫째 3·1운동때 유림조직이 적극적으로 가담않아 33인의 대표에 한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둘째로 시대적 조류에 맞지않는 구체제에 안주하려는 수구적 자세로 인해 산업육성을 통한 경제적 자립이나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고취 및 계몽사업에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했었다는 사실을 든다.

그러나 근래들어 개화사상의 유입으로 우리의 전통사상 계승이 단절됐을 뿐 아니라 개화파 활동의 사상근거가 일본식 근대화의 이식이어서 여러분야서 폐해가 적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유학선비들의 유학적 신념에 따른 독립운동이 재조명되고 있다.

금장태 교수(서울대·종교학)는 '일본강점기 유교의 독립운동'(한국근대사상의 도전)에서 유학선비들의 항일독립운동은 순절(殉節)과 망명, 유림단(儒林團)사건과 독립청원운동, 황국신민화에 대한 끈질긴 저항과 역사연구를 통한 민족의식각성화 등 각 시기마다 단계적으로 전통유학이념에 따라 다양하게 대응해 왔음을 밝히고 있다.

첫단계로 유학선비들은 망국의 책임을 통감하고 순절을 함으로써 속죄하고자 했다.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다 대마도로 끌려갔던 최익현이 '어떻게 원수의 밥을 먹고 살겠느냐'며 단식 끝에 죽어 돌아오자목놓아 곡을 하고 만사(輓詞)를 지었던 황현은 한일합방 소식에 '나라가 선비 기르기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사람 죽는 자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느냐'는 유서를 남기고 아편덩이를 삼켜 자결했다.

순창의 선비 공치봉은 '다행히 예의의 나라에 태어나 공자의 도리를 배웠는데 이제 나라가 깨어지고 임금이 없어지니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황천의 백골이 될지언정 섬오랑케의 백성이 되지는 않겠노라'하고 단식 자결하였으며, 금산의 군수 홍범식은 합방소식을 듣자 '백리의 땅을 지키고 있으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할 수 없으니 속히 죽는 것이 낫다'며 목 매 자결했다.

일제가 합방후 사회지도층인사에게 작위나 은사금을 주어 회유하거나 변절시키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자결하는 유학선비들도 있었다. 관직이 좌참찬에 올랐던 김석진은 작위와 은사금을 보내오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거절한 뒤 독약을 먹고 자결했으며,고성의 최우순은 '개 돼지도 안먹을 원수의 돈을 하물며 사람이 먹을까 보냐'며 거절하고 일제가 경찰을 보내 끌고 가려하자 음독자살했다.

연산의 김지수는 일제가 사은금 거부를 이유로 잡아 가려하자 목을 매었으나 며느리가 말리자 '지금 네가 나를 구하려는 것은 나를 해치는 짓이다'고 타이르고 죽었다. 한일합방에 저항 이처럼 목을 매거나 단식 또는 음독으로 죽은 유학선비는 전국 방방곳곳에서 3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유학선비들의 순절에 대해 일부에서는 망국의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이 자결로 대응하고, 더욱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이나 존화양이(尊華攘夷) 등 시대에 맞지않는 이념을 제시한 것은 무책임하고 소극적인 자세라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충절과 의리의명분을 무엇보다 앞세우고 살아왔던 유학선비들에게는 순절은 언행과 학행의 일치를 실천하는 것일 뿐 아니라 망국에 대한 사회지도자로서의 책임의식의 발로였던 것이다.

유학선비들의 항일독립운동의 두번째 단계는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으로 불려지는 독립청원운동으로 나타났다.파리장서사건은 제1차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시작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알리고 지원을호소한 거족적인 행사로 전국의 유림대표 137명이 공동문서에 서명한 합방후 유학선비들의 가장 큰 조직적인 독립운동이었다.

파리장서사건이 일어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대표들이 모여 3·1운동 거사를 모의할 때 유학선비들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양반의 신분의식이 여전히 남아있는데다 정통주의 신념에 젖어 여러계층의 타종교인과는 함께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비중이 큰 유림의 한 지도자는 3·1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모두 이교도이므로 유림단이 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수치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3·1 거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치욕으로 받아들인 진보적 유학선비들은 시대적 조류에 맞춰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설것을 논의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유림대표를 파견키로 결정했다.

영남의 유림 곽종석, 김창숙이 중심이 돼 시작된 독립청원운동은 결과적으로 호서지방을 비롯한 전국의 유림들이 참여해 장서를 만들고 김창숙이 상해를 거쳐 파리에 가있던 김규식에 보냄으로 공표하게 되는데, 핵심내용은 한국은 4천년 역사를 가진 문명국이며, 일본의 포악무도한 식민통치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만국평화회의가 이를 통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석주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사건이 발생하고, 친일 유학지식인들이 지난 행적을 반성하고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서를 발표하는 등 국내외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는 촉진제가 됐다. 세번째 단계는 한민족의 문화전통을 말살하려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정책에 대한 강렬하고 끈질긴 저항으로 나타났다.

일제는 1910년대의 무단정치, 1920년대의 문화정치에 이어 1930년대 들어가면서 조선어를 못쓰게 하는 것은 물론 신사참배를 요구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다.

이에 대해 대다수의 유학선비들은 일본이 만든 신제학교(新制學校)에 학생을 보내지 않으므로서 식민지 교육을 거부했으며, 자식으로서 어버이의 성을 버리는 것은 어버이를 버리는 것이라며 창씨개명에 불응했다.

유학선비들은 이밖에도 일제의 세금납부나 호적등록 강요에 어떤 계층보다 집요하게 저항했는데 이는 전통문화 계승에 강한 유학적 전통과 신념을 지녔기에 가능했다.

유학선비들이 자기들이 지켜온 전통사상에 근거한 항일저항운동은 최근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 일제의 아시아침략을 아시아를 근대화시킨 아시아해방운동으로까지 미화시키고 있는 데 대한 반론의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부각이 요구된다.

금장태 교수는 "유림의독립운동평가는 우리가 과거사에 대해 개혁적 태도를 가지느냐 계승적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유교의 이념이 오늘날 사회에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계승할 가치가 없는 공허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고 했다.

글:최종성기자

그림·제자:한승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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