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기다리는 사람

나그네는 어느 하늘 아래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구름 같은 꿈을 안고 하염없이 걷는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려는 알피니스트도 산을내려올 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설산 암벽에서 힘을 얻고, 죽음과 맞싸운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기다릴 희망도 없는 사람은 고아다.그 고아의 꿈은 언젠가 기적처럼 찾아올 부모형제 뿐이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깨어지지 않는 꿈, 그것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을 고행(苦行)이라 했지만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데 용기와 희망이 솟구친다. '즐거운 나의 집'의 작곡가는 집도 가정도 없었다지만, 나를 쉬게 하는 작은 집을 소망으로 하였기에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를 세상에 오래 남길 수 있었다.기다린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인가, 슬픈 것인가. 기다리다가 미워질 때도 있겠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아름답던 꿈이 산산조각 나고, 공허한 소식만이 전해질 때 자신까지 미워지기도 할 것이다.

용기·희망주는 '기다림'

나는 어린 시절, 10년을 부모님과 떨어져 고향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해보지 못했다. 어머니도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나는 바보처럼 기다리기만 하고 그리워 할 줄을 몰랐다.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내 손이라도 꼭 잡고 귓속말로 "보고 싶었지?" 하고 다독거렸더라면 얼마나 위안이 되었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세 살 들 때부터 고향의 할아버지 댁에서 컸다. 10년을 지나 철이 들고 나서 겨우 안동 부모님 곁으로 돌아갔다.한창 엄마를 찾을 시기에는 안동이라는 지명이 나를 기다리는 부모님의 대명사가 되었고, 지금도 안동 하면 가슴에 깊이 박인 그리움의 상처로 기억된다.

비가 오는 궂은 날이면 경부선 철길에서 40리나 떨어진 고향 마을까지 기적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가슴 속을 파고드는 그 긴 기차 울음소리는 나를 단숨에 안동으로 달려가게 했지만 신기루 같은 어머니와의 만남은 이내 꿈으로 사라졌다.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움이요, 그 그리움은 슬픔으로 변하여 가슴을 하얗게 적셔 놓았다.

방학 때 안동에 간다는 것은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었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안겨 본 기억이 없다.가끔 어머니가 할아버지 댁으로 오시면 세자가 왕비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일정한 공간을 두고 대화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어머니 품에서 자란 동생들보다 더 많이 울었다.

힘든 인생여정의 정다운 친구

말수가 적은 어머니께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나를 보고 싶어 했겠는가. 엄한 할아버지께 섣불리 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말씀도 드려보지 못하고 10년을 참고 기다려야만 했으니 마음 아픔이 오죽 했겠는가. 그 와중에 나는 기다리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병이 되어 언제나 두 손을 뒤통수에 얹고 청승스레 서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손을 뒷머리에 얹고 있으면 네 엄마 죽는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할아버지 할머니가 들에 나가시고 혼자 집에 있으면 부엉이 소리가 무서웠다. 가끔 비행기가 남쪽 하늘에 나타날 땐 그 비행기가 보이지않을 때까지 북쪽 하늘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면 북쪽 산등성에는 어머니가 저녁노을 속에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가는 금방 사라지곤 했다.

종일 혼자 집에 있는 동안 갑자기 소나기라도 퍼붓고 천둥 번개가 치면 나는 겁에 질려 혼자 엉엉 울었다. 나는 어쩌다 만나는 어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부모에게로의 귀환이 늦어졌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삶의 의미가 따사롭게 느껴진다. 판도라가 남겨 놓은 희망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데 한 가닥 희망을 가져 본다. 그래서 힘든 세상살이의 긴긴 여정은 외롭지 않고,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게 되는가 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