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생활문화
경주시 안강읍에 자리잡은 경주이씨 익재공파 청하공 종가. 익제의 22세손이자 청하공 13세 종손인 이상천(67)씨와 종부 류호순(64)씨가 종가를 지키고 있다. 종손이 600여년간 고집스레 지키고 있는 것이 제사와 상례. 한밤 중인 자시(子時)를 지키는 것은 물론, 제물의 가짓수와 놓는 위치, 높이까지 조금도 오차가 있어서는 안된다.
서원에서 모시는 봄·가을 제향 때는 잠자리가 편치 않은 서원에서 재계(齋戒)하는 마음으로 하룻밤을 자야할 뿐만 아니라 유건과 도포를 갖추지 않으면 참석할 수 없다. 여행지에서 주문한 음식으로 차례를 지내고 자손들의 편의를 위해 제사 시간을 맘대로 당겼다 줄였다 하는 요즘에는 보기 드문 일이다.
경북 달성군 현풍면 솔례마을의 현풍 곽씨 청백리공 곽안방 종가는 전통 성인식의 맥을 잇고 있다. 그 순서를 보면'빨리빨리'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먼저 재실 대청에 돗자리를 깐다. 문중 어른 한 분이 집례를 맡아 홀기를 부르고 참석자 모두 도포에 유건을 쓴다. 성년을 맞은 이가 어른으로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복장을 갈아입을 때마다 머리에 관을 씌우며 그 때마다 주례가 교훈의 말을 내리는 삼가례가 시작된다. 삼가례는 시가례, 재가례, 삼가례,다례축, 명자축, 사당차례 등 크게 여섯 번의 의례로 이어진다.
시가례는 평상복인 초록색 사규삼과 복건을 쓰고 주례 앞에 꿇어앉는다. 집사가 복건을 벗기고 머리를 빗겨 상투를 틀고 망건을 씌우는데 이 때 주례는 상투에 씌우는 치포관을 들고 나와 축사를 한 뒤 씌워준다.
재가례는 두 번째 관을 씌워주는의식. 흰 바탕에 검은 테를 두른 심의(深衣)를 입고 허리에는 대대라는 띠를 두른 뒤 오색 끈을 묶어 늘어뜨린다.마지막 관을 씌우는 삼가례에는 일상복을 벗고 벼슬아치들이 대궐 출입할 때 입는 북청색 관복을 입는다. 주례는 축사를 마치고 과거에 합격하면 어사화를 달고 쓰는 복두를 씌어준다.
삼가례를 마치고 나면 연두색 앵삼(鶯衫)을 입고 술이나 차를 받는다. 이 때 주례는 다례축을 읽는다. 차를 마실 때 땅에다먼저 차를 드리는데, 이는 오늘 이 자리에 있기 까지 천지신명의 도움에 감사하는 의미다.
성인으로서 편히 부를 수 있는 자(字)를 받는 명자례를 거쳐 사당차례를 한다. 사당에 과일과 술을 차려놓고 부모님과 함께 고유식을 올린 후 어른들께 큰절을 올린다. 이처럼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성인이 되지만 이를 귀찮다고만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절차를 거치면서 소년은 깊게 생각하여 비로소 어른이 된다.
수백년간 지켜온 전통 성인식은 훌륭한 문화상품으로 손색이 없다.뿐만 아니라 일생에 단 한번뿐인 혼례는 그 절차가 더욱 까다롭다. 그 절차의 가짓수만 스물 다섯에 이른다. 신랑이 입장하는'신랑하마공입'부터 술을 따라마시는 '행포배례'에 이르기까지 순서와 격식이 엄격하다.
평균 수명이 높아지면서 점차 간소화하고 있는 회갑도 종가에서는 아직 엄격하게 지키고 있는 곳이 많다.충남 공주시 옥룡동에 자리한 경주 이씨 국당파 초려 이유태 종가의 회갑연을 엿본다. 우선 아침 여덟 시에 선조의 사당에 올리는고유식(告由式)이 그 시작이다. 어른들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 남자들은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60세 넘어보이는 부인들은 모두 머리에 쪽을 진다.
제례복 차림으로 종손은 신주를 모신 벽장문을 열고 두 번 절하며 신주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목향을 피운다. 술잔을 들어 올렸다 내려놓고 고유축을 읽는다. 그 뒤 두 번 절하고 축문을 태우는 것으로 고유식을 마친다. 회갑을 맞은 어른들에게 자손이 네 번 절하는 것이 종손부터 어린 자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하객들이 올린 축수(祝壽) 글이 일일이 낭송된다.
엄격한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는 종가가 대부분이지만 종가도 현대화의 흐름을 비껴갈 수 만은 없다. 덕수 이씨 율곡 이이 종가는 아파트 서재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신주를 모신 감실에는 둘레에 앙장을 커튼처럼 두르고 종손과 종부만이 외출 때마다 신주 앞에서 절하며 인사를 올린다. 거실 입구 벽에는 성균관 종묘에 배향할 수 있도록 명한 교지가 표구한 채 걸려있다. 컴퓨터와 신주가 마주하고 있는 집. 이것이 현대 종가의 변화 모습이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종가의 음식문화
"추석 차례음식 한세트에 12만원".
추석이 코앞이다. 예전같으면 차례음식을 마련하느라 북적댔을 재래시장도 예전같지 않다. 전화 한통이면 빈대떡 100장에2만원을 주면 택배로 배달된다. 추석 준비가 가벼워졌지만 무언가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만 정성이 담뿍 담긴 종가 음식을 맛보기로 한다.
경북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지례예술촌'. 의성 김씨 지례파 지촌 김방걸(芝村 金邦杰·1623~1695)선생 종가가 있는 곳이다.종가에는 지촌 선생의 12세 종손 김구직(81)옹을 모시고 차종손 김원길(60)씨와 부인 이순희(55)씨가 살고 있다. 이 종가의 내림음식은 건진국수. 평범해 보이지만 직접 손으로 반죽해 숙련된 솜씨로 밀어야 하는, 품이 많이 드는 음식이다. 그래서안동에서 건진국수는 특별한 손님 상에 오른다.
건진국수의 특징은 안반에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4대 1로 섞은 반죽을 홍두깨로 미는 것이다. 종잇장처럼 얇게 밀어 실같이 가늘게 썬국수를 뜨거운 물에 삶아 찬물로 헹군다. 멸치로 맛을 낸 국물은 미리 준비했다가 차게 식혀 붓는다. 색색깔의 고명도 빠질 수 없는 별미. 석이버섯과 쇠고기볶음, 호박볶음, 달걀 황백지단으로 만든 오색 고명은 음식을 눈으로 맛본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현풍의 솔례마을 종부는 과일김치를 정성껏 담근다. 사과,배,밀감 등을 갈아서 새우젓갈을 넣고 붉은 생고추를 갈아넣어 양념한배추김치는 시원하다. 후식으로 즐기는 오방차 또한 품이 많이 드는 음식. 인삼과 마를 달인 물에 꿀을 넣어 단맛을 내고, 노란 송화를 꿀에 반죽해 덩이째 찻잔에 띄우고 가루차를 뿌린 것이다.
색색깔로 고운 곶감떡도 우리에겐 생소한 음식이다. 찹쌀과 멥쌀을 섞어 가루를 만들고 반죽을 한다. 고운 빛깔을 내는 과정이 독특한데, 푸른 색은 쑥으로, 가을에 피는 맨드라미 꽃대를 거꾸로 매달아 말렸다가 꽃잎을 찬물에 우려내면 다홍색이 나온다.
또 지단화를 말렸다가 갈면 노란 꽃가루가 되니 이들을 반죽에 섞어 세가지 색을 낸다. 화전 굽듯이 펴서 구우면서 그 위에 삶은 밤에 꿀을 섞어 만든 고명을 올린다.
또다시 반죽을 누에 모양으로 끝을 뾰족하게 두 개를 만들어 두 쪽을 맞붙여 태극 모양을 만든 뒤 고명 위에 올려 지져낸다. 꿀에 담갔다가 그릇에담을 때 웃고명으로 석이버섯채, 대추채, 밤채, 곶감채를 올린 다음 잣가루를 뿌리면 완성된다.
옛 어머니들이 해주시던 음식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비단 추억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전자렌지에 넣으면 30초만에 나오는 온갖 인스턴트음식 사이에서 지긋한 기다림과 손맛이 그리워서 일테다. 이번 추석에는 식구들이 둘러앉아 손은 많이 가지만 정성이 담뿍 밴 음식을 만들어먹으면 아이들에게도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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