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문화와 자연의 괴리

내가 지금까지 거처하고 있는 이 누옥으로 옮겨온 지가 벌써 30년이 가까워 온다. 그때 나는 40대 후반으로 내 일생의 뜻밖의 깊은 수렁에 빠져 망가진 나를 아파하고 방황과 자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고뇌와 고통 속에서 자리잡은 이곳은 내가 나를 재건하는데 이외의 안거가 되어 주었다.

그 때 여기에는 길 건너에 수성 들판이 퍼질려 있었고, 내 집 앞 밭뙈기 하나 건너에 여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에서는 종일 학생들의 해맑은 함성들이 하늘이라도 뚫을 듯이 울려퍼졌다.

중동네거리에서 파동 사이의 새로 닦은 큰 길엔 아스팔트도 채 깔리지 않은 터라 노선 버스나 짐차라도 지나가고 보면 듬성듬성 자리잡은 집들이 온통 보얗게 먼지를 뒤집어 써야 했고, 우리 동네를 끼고 흐르는 신천은 평소엔 가히 건천이었으나 큰 비라도 내리고 보면 일쑤 물구경을 다니기도 했던 변두리였다.

내가 이런 곳에 생거의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도심 속의 변두리를 찾았던 까닭도 있었으나 정작 내심은 앞산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요, 내가 지을 집터를 쉽게 선택할 수 있었던 까닭도 있었으나 내게로 마주 보이는 앞산 한 굽이가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달려오는 듯한 산과의 친화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머니속 사정

그 후 주머니 사정에 맞추어 집을 지었고 마당에 나무 포기도 심으면서 나는 방황의 늪에서 서서히 헤어날 수 있었고 특히 집 안에서 관산 자락(觀山自樂)의 즐거움에다가 등산의 버릇까지 얻게 되었으니 이 다행함이 또 어디 있었겠는가. 한데,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내 집 주변의 빈 터에는 어느새 빼곡히 집들이 포개어졌고, 길 건너 수성들판에도 삽시간에 빈터 하나 남기지 않고 주택으로 넘쳐나게 되고 말았다. 내 집 앞 여학교도 재단이 바뀌는가 했더니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말았고, 그 학교 부지엔 해전부터 아파트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금년 여름 그 많은 비에도 거침없이 공사를 속행하여 지금은 주로 내부 공사에 치중하고 있는 모양이다.

문이란 문은 다 열어 놓고 사는 우리네 여름 한철. 대대적 공사장에서 울려 쏟아져 나오는 각종 굉음, 괴음, 기타 소음들의 견딜 수 없는 피해는 일시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르고 있는 구조물에 햇빛을 잃고 조망을 빼앗긴 나의 가슴앓이를 어찌 다 표현해 낼 수 있겠는가. 이를 두고 상전 벽해라 했던가.

변화! 요즘 우리 사회에서 보는 환경의 변화와, 시대적 변화! 변할 것은 변해야 하고 개혁할 것은 개혁해야 한다. 서울 경기지역을 위시한 전국적인 변화와 시민 의식 흐름의 추이를 관망해보면 정도에 넘치고 용렬스러우리만치 다양하고 변해가고 있다. 20세기 후반 반세기의 흐름은 우리나라 5천년 역사의 전환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변했다 하여 지나칠까.

용렬한 자연의 마음

세계 2차대전 종식 당시와 오늘날과의 50~60년을 비교해 봄에 외적이든 내적이든 간에 지옥과 천국을 넘나드는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질 않은가. 이러한 사회적 당위성과 합용적 개혁에 발맞추어 전국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아파트 건설을 긍정하고 수용 환영하나, 개인과 사회의 삶의 질과 경제적 손익과 인권적 추구 등의 구체적인 문제와 한계를 따져 볼때 이러한 괴리를 어쨌든 풀어 주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제 골격이 완성된 21층의 내 집앞 아파트는 거대한 성곽처럼 위용을 과시하면서 서 있다. 산을 가로막고 하늘을 가리우고 정작 햇빛이 필요한 삼동절에 햇빛을 가로막고말 이 유령같은 검은 축조물에 대한 문명과 자연과의 괴리를 어찌 풀어야 할까.

동물의 복제에서 인간 복제 타당성 여부에 대한 논리까지 이끌어내고 있는 현실이나, 이는 인간에 대한 신비성과 존엄성을 인간 스스로가 말살할 수 있는 대죄를 안고 있는 것이다. 테니슨은 인간을 두고 "인간은 신과 같지 않다. 다만 가장 인간다울 적에 신을 닮는다"했다.

인간을 신의 차원에까지 높일 수 있는 차원 높은 존재로 끌어올릴 수 있는 인간의 존귀성과 존엄성을 인간 스스로가 존중할 때 인간의 진면목을 누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억울하면 너도 아파트로 가면 될 일이 아닌가라는 논리며, 또 아내의 아파트 행 독권 소리도 예사롭지가 않지만 나무 몇 그루의 푸름에 이끌리고, 해마다 이른 봄날 눈발 속에서도 창 밖으로 뻗어난 매화 굽은 가지에서 매화의 음향이 은근하게 내 발목을 잡는다.

이성수(시인.전 대륜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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