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무용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최승희(1911~?)다. 그러나 그간 월북 무용가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올해 최승희 탄생 90주년을 맞아 최승희의 삶과 예술을 세차례에 걸쳐 재조명한다.
"최승희는 조선 춤을 그대로 춤추는 것이 아니라 옛날 것은 새롭게 하고 약한 것은 강하게 하고 없어진 것은 재생했으며 자기 스스로 창작한 조선 춤을 췄다. 그녀에게 충만한 민족는 찬양받아야 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가 '최승희론'에서 밝힌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견해다. 일제 시대 식민지의 한 여성 무용인에게 쏟아졌던 극찬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최승희는 1911년 서울에서 2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열 여섯살이 되던 해 1926년 일본 전위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 발표회를 보고 이시이의 문하생이 될 것을 결심한다. 당시는 무용이란 말조차 없었으며 '춤'은 기생들이나 추는 것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시대였다. 그녀는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무용을 시작한다.
최승희는 체격조건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피나는 연습으로 일본에서 갈채를 받았다. 1m70cm에 가까운 늘씬한 키와 관중을 사로잡는 눈빛으로 일본인들을 매료시켰다.
1931년 그녀는 와세다대학 학생이자 프롤레타리아 문학그룹 카프에 소속돼 있던 안막과 결혼하게 된다. 그는 최승희가 세계적인 무용가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고국에서도 지방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대만원이었고 조선인에게 긍지를 심어주었다.
1942년 일본 잡지 '음악의 벗'에 실린 평론이 눈에 띈다. 무용평론가 이시가와 기요시(石川淸)의 '동양무용에 대하여-최승희론'은 당시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에서 발행된 잡지에서 극찬을 받을 만큼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시가와는 세계 무용사에서 최승희의 입지를 강조하고 있다. "기존 세계 무용사는 동양 무용 및 동양무용가들의 창조적 성과를 경시해왔다"고 지적하면서 "최승희는 세계 무대에서 동양무용이 갖는 우위성을 증명한다"고 극찬하고 있다. 또 최승희가 춤을 추는 모습에서 받는 감상을 정리하고 있다.
"'옥적의 곡', '보살춤'을 출 때는 동양적 정적의 시적 분위기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듯이 보이고 그녀가 '화랑무','초립동'을 출 때는 유머러스한, 한없는 명랑함이 느껴진다"고 적었다.
또 "'검무', '천하대장군'을 출 때는 그녀는 전혀 다르게 강렬하고 격렬하게 무용을 창조하고 '칠석의 밤', '춘향애사'를 출 때는 심연의 슬픔을 풍긴다"고 밝힌다.
특히 최승희가 "서구 무용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예술적 생명을 낳게 한 조선 무용의 재생과 새로운 동양무용의 창조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 결과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최대의 성과를 거둔 것은 민족의 전통에 뿌리내린 강인함을 알려주었다"고 평하고 있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