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예술의 한 분야인 '스크린핸드페인팅'은 일반인에게 생소하다. 섬유나 천 위에 그림이나 패턴을 세밀하게 그려넣는 어려운 작업인 탓에 이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가 대구에서는 열 손가락에 다 꼽을 정도로 그 층이 아주 엷다.
청각.언어장애 2급의 중증 장애인 김교생(48.대구대 사무처 직원)씨. 그는 이달 중순 경기도 일산직업전문학교에서 열린 제19회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스크린핸드페인팅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전국의 우수기능 장애인들간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수화나 필담으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고충을 겪고 있는 그에게 이제까지 예술은 세상과 자신을 연결시켜준 통로였다. 지난 30여년동안 서양화, 광고미술, 공예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그의 삶은 장애를 극복한 한 인간의 조용한 승리이기도 하다.
김씨는 세 살때 홍역을 앓아 청각을 잃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 3학년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쾌활하고 밝은 성격의 김씨에게 세상은 넘지 못할 높은 벽만은 아니었다. 학업성적도 우수했고 특히 예술분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특수학교인 대구영화학교 재학시절 그는 혼자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의 권유로 그는 장차 예술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졸업과 함께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그에게 막상 다가온 것은 자개공예.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했다. 전문적인 기술이 요구되는 일이라 힘이 들었지만 열심히 배웠다. 어려운 가정형편에다 건강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중 대구대(당시 한사실업전문대)에서 공예를 가르치던 정대수 교수의 눈에 띄어 청강생으로 서양화를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에 입문했다. 장애인을 위해 헌신한 고(故) 이태영 총장이 수학을 허락하는 한편 자신의 판공비로 김씨의 실험실습비를 대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2년동안의 수학을 끝내고 취업을 준비중이던 1981년, 그에게 기회가 다가왔다. 유엔(UN)이 정한 '세계장애인의 해'를 맞아 이 총장이 김씨를 '재능있는 장애인'으로 추천, 대구대에 취직한 것이다. 대구대부설 전국장애인기술교육센터에 배치돼 근무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아나갔다.
이 무렵 관심을 갖고 있던 광고미술에 김씨는 많은 시간을 들였다. 또 장애인들에게 조각과 그림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되돌려주는데 열정을 다했다. 은사의 소개로 만난 지금의 부인과 4년동안의 연애끝에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그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81년 제1회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 광고미술부문 은상을 시작으로 광고미술 부문에서 세차례나 은상을 받았고, 각종 공모전과 기능경기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큰 성과를 냈다.
1998년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에서는 영예의 대상을 차지한데 이어 이듬해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 추천작가에 올랐다. 김씨는 총 28개 정규종목을 겨루는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이제까지 세 부문에서 1위(금상)를 차지하는 신기원을 이루었다. 목공예(94년), 목공도장(96년) 부문에서 잇따라 정상에 올랐고 이번에는 스크린핸드페인팅 부문까지 금상을 거머쥐었다.
후배의 권유로 시작한 스크린핸드페인팅은 올해로 20년째. 그동안 작업이 어려워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작업대에 매달렸다. 이처럼 역경을 딛고 당당하게 일어선 그의 발군의 성과 뒤에는 끊임없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
퇴근 후 매일 2, 3시간씩 작품구상에 몰두하고, 주말과 휴일이면 스크린핸드페인팅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등 작품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평소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마음에 드는 소재를 만나면 스케치해두거나 카메라에 담아 작업에 활용하고 있다. 사전작업을 하면서 익힌 사진촬영이 이제 그의 유일한 취미가 됐다.
김씨는 이번 기능경기대회 금상 수상으로 내년 11월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되는 제6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한국대표 선발전에 참가할 자격도 얻었다. 선발전에 대비해 더 열심히 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힌 김씨는 1, 2년내 개인전도 열 계획이다.
두 해전 대구대 사무처 비품기자재팀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그동안 학교 업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작품을 게을리한 것이 나이가 들면서 후회스럽다"면서 "이제부터라도 빠른 속도로 작업을 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퇴근해 귀가하면 11세된 외동딸이 그를 반긴다.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곧잘 아빠를 따라하며 미술에 재능을 엿보이고 있는 딸아이를 보면서 김씨는 직접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늘 흐뭇하기만 하다. 농아(聾啞)의 숙명임에도 '장애인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의 이야기는 이 세상을 향해 메아리치는 맑은 큰 소리임에 틀림없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