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의 우리나라 화단에는 흑백의 무채색이 두드러졌다. 전후의 가난 때문에 물감을 사기 어려웠던 화가들은 검은 물감을 주로 써서 화풍조차 국운과 빈곤을 그대로 반영했던 셈이다.
이미 18세에 '선전'에 입선하는 등 천재성을 보였지만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평생 호구지책을 위해 갖은 고생을 한 서양화가 박수근(朴壽根·1914~65)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해방 전엔 단벌 옷 신세였으며, 월남한 뒤에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연명했다. 그의 그림들은 생전에 생필품과 교환되거나 헐값에 팔리는 게 고작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부대에서 함께 일했던 소설가 박완서씨는 일하는 아낙네들과 헐벗은 나목을 즐겨 그리던 그의 순하고 착한 모습을회고하며 장편 '나목(裸木)'을 쓴 바도 있다. 지금은 '국민 화가'로 떠받들려지며 이중섭(李仲燮)과 함께 '가장 비싼 작가'가 됐으니 '아이러니'가아닐 수 없다. 올해 뉴욕에서 그의 그림은 현대회화 경매사상 최고가인 7억5천만원을 기록하지 않았던가.
▲안타깝게도 박수근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생가 터)에 세워질 그의 미술관이 끝내 유화(원화) 한 점 없이 오는 25일 문을 열게 될 모양이다. 1999년부터 추진된 이 미술관 건립은 빛을 보게 됐으나 양구군 예산 24억원(공사비 21억5천만원, 작품 구입비 2억5천만원)으론 호당 1억원을 호가하는 그의 유화를 구입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양구군은 앞으로 예산을 확보해 유화 한점이라도 구입하겠다는 의욕을 보이지만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미술관 건립은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 추진위원회'가 추진해 왔으며, 정탁영 유홍준 홍석창 함섭 박명자 이대원 홍라희씨 등 미술계 인사들과 유족들이 참여하고 있다. 공모를 통해 선정된 이종호씨의 설계로 이뤄진 건물은 지상 2층, 건평 200여평 규모다. 외양은 그의 면모와 같이 소박하게 꾸며지고,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그 특유의 '박수근 나무'도 주위에 심어지게 되며, 1억5천만원을 들여 구입하고 기증받은 판화·드로잉 등150여점이 전시된다 한다.
▲박수근의 그림 수집에 수억원을 쓰거나 그의 작품으로 치부(致富)한 사람들은 어떤 심경일까.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말이 있지만, 초등학교만 나와 독학했고 앓는 아내에게 닭국을 먹이기 위해 백리 길을 걸을 정도로 가난 때문에 울며 살았던 그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노점 여인의 시름을 헤아리기나 할는지…. 평범한 서민의 질박한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한 그의 그림들은 대부분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한다. 이제 가까스로그의 예술적 향기를 가까이 할 수 있는 미술관을 풍성하게 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할까.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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