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간데스크-사랑의 지렛대

미국의 금융전문지 포브스 최근호는 영화나 만화 등의 등장인물들을 대상으로 한 세계의 가상(假想) 갑부 15명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그중 최고 갑부는 산타클로스였다. 산타의 나이는 1천600세 이상이고 그의 추정 재산액수는 장난감 형태로 보유중인 재산 총액이 무한대로 나왔다.

두 번째 갑부는 미 주간지 연재만화 리치 리치의 15세 주인공 리치의 247억 달러, 세 번째는 뮤지컬 애니의 주인공 애니를 입양한 기업가 올리버 워빅스의 100억 달러 등이 잇따랐고, 영화 배트맨의 주인공 브루스 웨인,101마리 달마시안의 악녀 크루엘라 등도 세계적 갑부에 포함돼 있다.

이 이야기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한 번 웃어나 보자고 포브스가만들어낸 유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결국 돈 이야기로 귀결되는 요즘의 가치관을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겠다.

'부자로 산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요즘 우리네의 최대 화두가 아닌가 싶다. 10대 청소년들이 그 풋풋하니 어여쁜 시절을 밤잠 안자고 죽기살기로 공부하는 것도 결국 그 속내는 좋은 대학, 인기학과 졸업한 후 좋은 직업을 갖고 평생 돈 걱정없이 여유있게 살고 싶은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전염된 때문아닐까. 기초학문, 인문학이 사멸위기에 이른 것도 이같은 풍조를 잘 말해준다.

그래선지 '부자되세요'는 이미 우리사회에서 가장 재치있는 축복의 말이 됐고, 젊은이들은 미래의 청사진을 놓고 '부자아빠'가 되겠노라고 다짐한다.아닌게 아니라 이탈리아 경제학자 발프레도 파레토가 예견했던 '20대 80의 사회', 즉 부유한 20%의 사람들이 80%의 부를 누리고, 가난한 80%의 사람들이 20%의 부를 나눠가져야 하는 상황이 이미 도래했다.

전세계에 걸쳐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커져가고 있어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든 가난한 사람들의 인생살이 곳곳에서 목줄을 죄고 있다. 마치 히말라야 등반객들 앞에 놓인 천길만길의 낭떠러지 크레바스처럼.

우리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악순환 고리가 얼마나 견고한지 가진 자들은 가만 있어도 재물이 스스로 몸을 불려가고 없는 이들은 삭신이 부서지도록 일해도 가난을 벗기 어렵다.

세계적인 명품에 대한 일본인들의 극성스런 자세를 흉봤더니 요즘 우리사회에서도 값비싼 명품일수록 잘 팔려 백화점마다 늘어나는건 명품코너이다. 부유층 동네의 학교 아이들과 서민동네 학교의 아이들은 방학중 해외여행이나 어학연수문제에서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서울의 한 지인은 서울사람들의 돈 씀씀이에 비하면 대구의 돈은 돈도 아니라고 했다.

개업기념일에 단골고객들을 초대한뒤 통째로 빌린 골프장에서 골프잔치를 벌이는 것도 낯설지 않을정도라고 했다. 지난 시절엔 가난한 수재들이 많았지만 요즘은 눈씻고 봐도 부유한 수재들만 눈에 띄니 '개천에 용났다'는 말도 조만간 사라질지 모르겠다.

빌 게이츠를 생각해 본다. 컴퓨터 사업의 천재, 세계 제1의 부자…. 그러나 그는 또한 세계에서 첫손가락 꼽히는 자선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도 처음부터 자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지난 90년대초,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몸집이 거대해져갈 무렵, 받은 혜택을 사회에 환원하라는요구가 사방에서 들어왔다. 그러나 컴퓨터에만 미친 그는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그의 부모가 '선량한 시민의식에 입각한 선행을 할 것'을 설득하고 독려도하여 94년 그리 많지 않은 9천400만달러의 기금으로 재단을 설립, 처음엔 학교와 도서관건립 등을 지원했다.

그러다 돈이 없어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파리목숨처럼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참상을 신문에서 접한뒤 그의 인생관은 달라졌다. 이후 제3세계 어린이와 여성들의 건강을 위한 백신연구 등 의료지원사업의 전폭적인 후원자가 됐다. 현재 그와 그의 아내 이름을 딴 빌&멜린다 게이츠재단은 역사상 가장 거액인 240억 달러의 기금으로 가난한 자, 아픈 자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이들 부부는 돈을 대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는다. 아내 멜린다는 아프리카 현지로 날아가 때묻은 아이들을 껴안아주고, 남편 빌은 현장으로 가지는 못하지만 그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면역학 서적을 읽고 지원사업의 추진상황을 체크하면서 깊은 애정을 보내고 있다. 냉철한 컴퓨터기업가의 이같은 따스한 변신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미국 정부가 MS사를 상대로 낸 반독점 소송에 대한 이미지를 상쇄하기 위해 자선을 택한 것이 아닌가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그의 지속적이고 진지한 자세를 보고 이내 수그러들고 말았다.

미국이 아무리 썩어 문드러진 것 같아도 그 중심에는 카네기재단, 록펠러재단, 포드재단처럼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못 배운 자들을 위해 거금을 흔쾌히 쾌척하는 '잘 사는 부자들'이 숱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므로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의 면모를 유지할 수가 있다. 근래 우리사회에서도 생면부지의 타인들을위해 평생 근검절약하며 모은 거금을 내놓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는 김밥장사, 삯바느질, 행상 등으로 힘겨운 삶을 꾸려오면서도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살아온 민초들이다. 과문인지 몰라도 이땅의 내로라하는 대기업가, 유명 정치인들 중 한줌의 자기과시나 정치색 없이 순수하게 이웃을 위해 거금을 내놓았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를 못했다.

오래전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누구나 필요 이상의 부를 물이 흘러넘치는 물동이에 부어지는 물만큼이나 무용(無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1911년에 카네기 재단을 만들어 카네기 공업대학과 카네기홀을 건립했고 미국과 영국에 2800여개의 도서관을 세워 사회에 부를 환원하는데 앞장섰던 강철왕 카네기는 평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부자로 죽는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또 노령에 접어들자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새기게 했다. '여기, 나보다 현명한 사람을 주위에 모으는 기술을 알고 있었던 한 인간이 잠들다'. 많이 소유한 자보다 많이 나누는 자가 진정한 부자라는 것을 카네기는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리고 현재 세계 제1의 부자 빌 게이츠는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기업가로서의 그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큰 도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 '잘 사는' 부자들은 자신에게 잠시 머무는 부를 사랑의 지렛대로 사용함으로써 이 세상에 더 크고 아름다운 사랑의 포자를 만들어가는 진정한 부자이다.

전경옥(특집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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