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는 제작도구인 칼의 속성상 의미가 강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홍익대를 졸업한 박건웅씨의 장편 판화집인 '꽃'(새만화책 펴냄, 2만원)에서는 이런 날카로움의 미학을 전편에 걸쳐 만날 수 있다.소재는 일제시대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가, 혹은 조직에 의해 파멸돼가는 한 개인의 일생.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아픔과 한이 예리한 조각칼에 의해 속속들이 드러난다.
이름모를 나즈막한 산등성이에 피어있던 야생화의 씨가 바람에 날려 차가운 감방에 닿는다. 그 곳에는 일제강점기시절 징용에 끌려갔었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빨치산'이 돼 붙잡힌 무기수가 기약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는 자백을 강요당하면서 늘 고문을 받지만 꽃씨를 심으면서 기억조차 하기 싫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간다.
그 어린 시절은 현재의 무기수 생활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는 고통으로 가득하다.홀어머니밑의 무지렁이 소작농이었던 그는 우연히 지주의 딸과 가까워지지만 신분차이로 인해 무시되고 한글을 가르치며 정신적 지주가 됐던 젊은 선생님은 눈앞에서 일본순사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청년시절은 일제 징용, 이어 해방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오지만 어릴 때의 그녀는 경찰이 된 친구의 아내가 돼있다. 그리고는 좌우익 대결의 혼란속에서 우연히 정치지도자의 암살현장에 있다가 범인으로 몰려 또 다시 감옥행. 여기까지가 1부의 줄거리. 2~4부에서는 빨치산이 된 그가 신념에 따라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고 체포되는 과정까지의 회상을 담고 있다.
순수 제작기간 5년, 전체 1천150쪽의 장대한 분량(4부로 기획돼 420쪽의 1부가 먼저 출간됐다)의 이 목판화집은 '무언(無言)'이지만 어떠한 웅변보다 강렬하다.또 제목인 꽃은 씨, 꽃잎, 야생화 등의 모습으로 고통스러운 과거의 현장 곳곳에서 나타나 전체 이야기를 끌어가는 '희망'을 암시하지만 현실은 그 어느 곳에서도 희망이란 것이 있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정지화기자 jjhw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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