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에 가을 빛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산은 여름보다는 오히려 가을부터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같다. 산은 바라보는 자의 위치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바라보는 자의 마음에 따라 다른 자태를 띤다. 원래 산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바라보더라도 단 하나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뿐이요, 아무리 만감이 교차하더라도 단 하나의 자태로 서 있을 뿐이다.
옛날 중국의 당나라에 국가의 관리를 임용하는 기준이 있었다. 사자성어로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의 조건을 갖추어야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다. 여기서 신은 훤한 신수를, 언은 조리있는 말씨를, 서는 수려한 문필을, 판은 사려 깊고 정확한 판단력을 뜻한다. 당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지만, 인재양성의 조건은 오늘 여기서도 변함이 없는 것같다. 단지 신언서판을 이해하는 관점이 바뀌었을 뿐이다.
유명한 인터넷 사이트나 잡지를 뒤적이면 어김없이 뜨는 것이 맞춤식 성형수술과 다이어트 광고이다. 그 비싼 광고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은 그 만큼 장사가 된다는 뜻이리라. 이제는 단순히 아름다운 외모를 넘어서서, 스스로의 개성과 취업, 성공적 미래를 위해 몸을 고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말 못하는 사람은 오늘도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기 십상이다. 국가적 인재는 고사하고 장사를 하더라도 말을 잘 해야 한다. 우선 말로 마음을 사야만 물건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고는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의 말이다. 한약재상을 하는 어느 부부가 있었다.
원래는 남편이 한약재 전문가였으나, 출타 중에는 아내가 약재를 팔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남편이 팔 때보다는 아내가 팔 때 매상이 더 올랐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아내가 가게를 본다고 한다. 물론 아내의 말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필은 요즘 조금 뒷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글이 손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글은 펜이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쓰는 것이다. 정신에 없는 기운이 글에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이요, 생각하지 못한 것이 손으로 쓰여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말도 단순히 입놀림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의 전개이다. 또한 사람은 외모보다는 말과 글에 마음을 빼앗기며, 마음을 빼앗기면 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이다.
네 번째의 판단력은 아마도 이중에서는 가중 중요한 요소인 것같다. 우리의 일상을 벗기고나면, 인생은 결국 중요한 몇몇 판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학교를 다닐 것인가? 어떤 일로 먹고 살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과연 이것인가 저것인가? 인생살이의 중요한 각각의 시점에서 언제 분연히 일어서고, 어디로 갈 것이며, 결국 어디에 안주할 것인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매 순간 내려야 하는 판단에 달려 있다.
나아가 인간은 어쩌면 판단에 처형된 존재인지도 모른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운명처럼 다가오는 판단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를 인생의 간판이나 학벌로 이해하는 사람도 많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느 시대이건 경쟁의 시대가 아닌 적이 없었다. 따라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건 신언서판은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 갖추어야할 기준이다. 글로벌 시대에 국가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인재들은 신수가 훤하고, 말씨가 탁월하며, 문필이 수려하고, 판단력이 정확해야 한다.
신수는 성형이 도와준다 하더라도 나머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어도 말과 글 그리고 판단력을 기르는 기초는 낭랑한 목소리의 책읽기에 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대입 기준인 수학능력 시험이 신언서판을 길러주는가? 서울의 학원이, 아니 강남의 학원들이 이를 길러주는가? 거의 모든 취업의 자격 조건이 되고 있는 영어 토익이나 토플 점수가 이를 대신하는가? 인문학과 순수학문을 타도해버린 대학교육이, 드센 소리의 교육정책이 이를 감당할 수 있는가? 깊어가는 가을산에 풀벌레 소리는 여전히 요란해도, 책다운 책 읽는 소리 이미 끊어진지 오래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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