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삶-상주 '모동포도' 개척자 정의선씨

참외하면 고령을 먼저 머리에 떠올리고, 포도하면 상주 '모동포도'라고 할만큼 모동포도는 최상품 포도다. 타 지역의 포도에 비해 당도가 월등히 높아 맛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이런 '브랜드 파워' 때문일까. 10㎏ 상자당 가격이 다른 포도보다 많게는 1만원가량 비싸도 서울, 대구 등 대도시 소비자들은 모동포도를 찾는다.

모동포도의 본향인 경북 상주시 모동면 반계리를 찾아 나섰다. 경부고속도 추풍령 IC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충북 영동군 경계를 슬쩍 넘어 10분가량 더 들어가면 추풍령 고개가 턱 앞인 고지대.

차창밖으로 여기저기 포도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불과 20년전만해도 벼농사에 의지해 어렵게 살아가던 한촌(閑村). 이제는 면 전체가 거대한 포도원으로 바뀌어 전국에서 이름 높은 모동포도 산지다.

반계농원 주인 정의선(52)씨. 그는 모동포도의 신화를 일궈낸 장본인이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그가 귀농을 택한 것은 1979년. 당시 탈농현상이 심했던 때라 귀농은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조용히 글이나 쓰고, 낚시나 하며 농촌에 묻혀 살려고 귀향했지만 그에 눈에 들어온 것은 죽어가는 땅과 어려운 농촌 현실이었다.

그러다 1983년 우연한 기회에 포도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포도농사에 뛰어들었다. 경험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냥 맨 몸으로 부닥쳐 배우고 익혔다. 여기저기 세미나에 참석하고, 외국서적을 탐독했다. 또 서울 등지로 포도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질문하고 기록하는 등 포도에 대해 하나둘씩 배워나갔다.

전문가를 만나면 하도 질문해대서 '진드기'라는 별명도 얻었다. 하지만 기후와 토질에 맞지 않아 몇년동안 실패를 거듭했다. 대출금을 갚지 못해 포도밭과 집을 몽땅 차압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유기농법에 계속 도전했다. 제초제와 독성이 강한 농약을 치지 않아 인체에 해롭지 않은 포도, 건강한 포도를 꿈꾸었다. 일반 농약도 점차 줄여 나갔다. 일본 등 외국의 사례를 샅샅이 살펴본 끝에 그는 국내 최초로 포도에 봉지 씌우기를 시도했다.

당시로서는 포도송이에 봉지를 씌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 온전히 햇빛에 노출돼야 단맛을 낼 수 있다는 고정관념때문이었다. 정씨는 산광(散光)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봉지를 씌운 후부터 포도에 치명적인 만부병도 없어졌다. 무엇보다 당도가 뛰어난 포도가 영글기 시작했다.

대개 3년만 지나면 수확할 수 있는 포도지만 정씨는 유기농법으로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끝에 겨우 수확할 수 있었다. 화학비료도 쓰지 않았다. 땅을 살리기 위해 퇴비만을 고집했다. 그 결과 그의 포도밭에는 지렁이가 생기고, 두더지가 찾아들면서 뱀도 눈에 띄었다.

밭에 나갈때면 늘 장화를 신는 것도 이 때문. 땅과 사람을 생각하는 그의 생명철학이 땅을 되살린 것이다. 10년 넘게 대구교육대 학생들과 대구 소비자단체 회원들이 유기농법을 배우는 환경농활을 위해 정씨의 포도원을 찾는 것도 그의 환경농법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그의 성공사례는 이내 모동면 전 지역으로 퍼졌다. 농가마다 포도농사를 시작하면서 정씨도 덩달아 바빠졌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농사법을 가르쳤다. 그의 덕에 불과 10여년만에 상주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인 모동이 포도산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 모동면 농가 95%가 포도재배 농가. 지난해 면 전체 포도생산에 따른 소득이 200억원에 이른 것만봐도 지역경제에 포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1994년 몇몇 재배농가와 더불어 중모포도영농조합을 설립한 정씨는 포도가공에 눈을 돌렸다. 유기농 생식포도는 쉽게 변질되기 때문에 가공은 필수. 포도즙과 포도주 연구에 골몰했다. 우여곡절끝에 1995년 전국 최초로 대기업이 아닌 농민이 포도주 제조허가를 국세청으로 받아냈다.

그의 이름을 따 '정의선포도주'를 생산하기 시작했지만 판매 길은 봉쇄된 상황. 5년 넘게 불합리한 현실에 맞서 싸워 주장을 관철시킨 정씨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자연발효 포도주로 생산하고 있다. 또 설비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국내 최초로 저온착즙기계를 개발, 양질의 포도즙을 생산해내고 있다.

유통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1986년부터 복잡한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한살림회, 푸른평화, YWCA,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등 소비자단체와의 직거래를 통해 가격합리화에 앞장섰다. 대구시내에서 모동포도를 좀체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유기농산물에 대한 인식이 낮고, 소비자단체와 직거래하기 때문.

소비자회원(www.podoo.com)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도 조합의 특징이다. 생과와 착즙, 포도주 등 전량 직거래하고 유기농 현장체험, 포도주축제 등에 초대하는 등 늘 가족처럼 대한다.

재작년 정씨는 경북도, 중소기업청, 안동대와 공동으로 산학연 컨소시엄을 구성해 '포도씨에서 항암과 노화방지, 기억력 증가에 탁월한 항산화제 추출방법'을 연구해 특허출원도 했다. 포도씨에서 추출한 항산화제를 첨가한 기능성 포도주를 비롯 포도즙 및 포도씨 식용유, 포도씨 비누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해낼 계획.

식용유와 비누는 현재 시제품이 나온 상태다. 이같은 노력끝에 정씨는 지난해 중소기업청으로부터 벤처기업 승인을 받은데 이어 제1회 '경상북도 벤처농업인'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정씨는 틈나는대로 도시 소비자들을 대상으로한 강연에 나선다. 주부, 교수, 변호사, 화가, 성직자 등 다양한 계층의 소비자 회원들은 대부분 그의 강연을 듣고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들.

강연 때마다 주부들에게 '과외나 다이어트 등에 정신 팔지말고 환경호르몬이 무엇인지, 어떻게 땅이 죽어가는지 공부 좀하라'고 따끔하게 한마디 한다. 때로 강연 후 볼멘 소리로 "늘 그렇게 당당하게 삽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먹을 거리를 생산하는 농민이 당당하지 못하다면 누가 이 세상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까? 아이들의 미래, 땅과 생명을 위해 유기농업하는 농부야말로 어느 누구보다 큰 소리 칠 자격이 있습니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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