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한글날과 간판 문화

오늘은 '한글날'이다. 오늘따라 거리에 무질서하게 난립해 있는 간판을 보니 새삼 '한글날'이 무색해진 느낌이다. 어느 사이에 우리의 간판에 'どんカツ(돼지고기커틀릿),のみや(술집),すきやき(전골),すしや(초밥집), かんぱい(건배)' 등 일본어가 원색적으로 쓰이고 있고, '똥싼바지, 곧 망할집, 바람난 집, 돈도' 등 보기에도 민망한 한글 남용 간판이 버젓이 걸려있는가 하면, 국적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말들이간판용어로 판치고 있다.

자꾸만 퇴색해 가는'한글날'. 거리의 간판을 보니'한글'의 소중함을 인정치 않는 것만 같아 '한글'연구와는 별로 연관이 없는 건축가이면서도 안타깝기조차 하다.1960년대에 "길을 가다가 '사장님' 하고 부르면 모두 돌아본다"는 노랫말이 있었다. 당시 사장이란 요즘 말하는 대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인CEO(Chief Executive Officer)와는 물론 다르다.

'회전의자' '아랫배가 나온 사람' '세로줄로 박힌 명함' '책상위 삼각 자개 명패' 이런 것들이 사장을 연상케 하는 소위 간판이었다. 이러한 1960년대의 간판 정서가 지금은 각양각색의 모양과 문자로 건물 밖에 혼란스럽게 내다 거는 문화로 바뀌었다. 심할 때는 건물을 간판으로 도배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건축가로서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건물의 옥상, 벽, 창, 출입문, 복도, 계단 심지어 바닥까지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다. 아무리 좋은 재료로 건물 외관을 마감해봐야 간판에 못질 당하고 본드로 풀칠 당해서 이내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이 지경이고 보니 이제는 미관만 해치는 간판으로 보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의식' '우리 글자 한글에 대한 의식' 이런 것들을 가늠하는 의식으로 보고 싶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고 자기 PR시대라고 해도 무절제한 간판 설치와 외래어 남용은 도시경관을 해치고 국민의 자주(自主)의식을 해치기 때문이다. 입주자가 바뀔 때마다 두 겹 세 겹 누더기처럼 간판을 덧붙이는 현실. 우린 아직 타인을 자기만큼 인정치 않는 수준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모든 타인 속엔 결국 나도 포함되어 있는데 말이다. 여기도 간판 저기도 간판, 대학도 간판, 출신도 간판 이제 그 흔한 간판 좀 정리했으면 좋겠다.

영남이공대학 건축과교수/경북도 문화재전문위원 최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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