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9일)는 제 556회 한글날. 태극기를 내 건 집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한글날의 의미를 한번쯤 생각해본 사람은 더욱 드물었을 것이다.그렇게 지내는 사이 알게 모르게 한글은 많이 달라졌다.
버티칼, 몰리, 바비, 우드스탁, 엑스 앤(엑슨), 머핀, 그랜드 하바나, 댄버, 매트로, 아프리카, 앙시, 시스템, 머핀…. 20대 남녀에게 기억하는찻집이나 음식점 이름을 말해달라고 요청하자 속사포처럼 쏟아낸 가게 이름들이다. 모두 영어나 불어다. 니뽀(니 하고만 뽀뽀한다)는 한글을축약해서 만든 이름이지만 외국어 같은 어감을 가졌다.
외국어가 아니면 외국어 흉내라도 내야 장사가 된다는 말이다. 억지로 찾아보면 한글 이름이 몇 개 나온다. 그나마 '웬일이니, 웬일이니' '깎을래 볶을래'등 감탄사나 의태어를 연상하게 하는 말들이다.
"영어나 불어 이름이 세련돼 보이잖아요". 대학생 박모양이 외국어로 된 음식점이나 찻집을 선호하는 이유다. 분위기가 조금 떨어져도 이름이 멋있으면 들어가고 싶다고 이 여학생은 덧붙인다. '점령군 외국어'의 공세는 가게 이름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 이름을 비롯해 의류 잡지 신발 장신구 문방구 스포츠 용어 과자이름 등 외국어는생활전반을 점령했다. 저항의지를 상실한 한글은 속절없이 퇴각을 거듭할 뿐이다.
90년대 초반 한때 열풍처럼 불던 한글이름도 이젠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대구시 동구의 한 유치원에는 230명의 원생 중 약 5%만이 한글 이름을 쓴다. 수성구의 한 유치원엔 아예 단 한 명도 한글 이름을 쓰는 아이가 없다. 수성구의 한 초등학교도 1학년 학생 270명 중 한글 이름을 쓰는 아이는 한 명도 없다. 2학년에 1명이 있을 뿐이다.
5, 6학년에는 10%쯤 되는 아이들이 한글 이름을 쓰고 있다고 이 학교 교사는 덧붙인다."예쁘고 기억에 남는 이름을 짓고 싶어서 한글 이름을 지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바꾸었으면 해요". 초등학교 고학년 자녀를 둔 한 어머니는 나중에어른이 되면 아이가 가벼운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한글 이름을 지었다가 한문 이름으로 바꾸는 부모들도 많다.
"이름을 바꾸는 사람 10명 중 1명은 한글 이름을 한문으로 바꾸는 경우입니다". 대구시 달서구청 호적계 이윤정씨는 자녀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이름을 바꾸어 신고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고 말한다.
'햇살, 햇볕, 하나, 두리, 바람' 등이 그렇다. 한글 이름은 집에서 쓰는 애칭 정도로 생각하고 장래를 생각해 새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다. 물론 한글이름 짓기 열풍이 불 당시 지나치게 시류에 휩쓸려 지은 이름이 많은 때문이긴 하지만 어른이 되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다소 '무식한'발상에서 한글 이름을 폄하하는 풍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쁜 이름을 짓고 싶은 부모들의 열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글 같은 느낌을 주는 한문 이름이 그것. 이윤정씨는 예쁘고 독특한 이름을 짓되 한문으로 음을 표기할 수 있는 이름이 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이에 따르는 문제도 드러나고 있다. 많은 이름이 '예, 다, 빈' 등 몇몇 특정한 글자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수성구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한 반에 '예빈, 예지, 예은, 예인, 예림'이가 같이 수업을 받는 촌극도 벌어진다. '형빈, 경빈, 다빈, 영빈, 수빈' 등도 마찬가지이다.
백두현 교수(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과장)는 "아이 이름을 시류에 휩쓸려 줏대없이 짓는 것은 곤란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조금만 더 신중을 기하면 어른이 돼서도 쓸 수 있는 한글 이름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덧붙인다. 달력에 공휴일로 빨갛게 표시돼 온 한글날이 1991년부터 검정으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자칫 한글에 조종을 울리는 날로 바뀌게 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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