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신비스런 그림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신비스러운 것이 한 둘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림자다.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면 뒤따라 쫓아오고, 퇴근 후 집안에 들어오면 몰래 숨어 들어와서 같이 휴식을 취하다가 밤늦게 이부자리에 들면 살며시 이불 속으로 찾아 들어온다. 그래서 비서 같기도 하고 경호원 같기도 하여 믿음직스럽고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탐정꾼 같기도 하고 미행자 같기도 하여 얄미울 때도 있다. 꽁꽁 묶어도 묶이지 않고, 잡아도 잡히지 않으며, 찢어도 찢기지 않고, 흙 속에 묻어버려도 묻혀지질 않는다. 나타났다간 사라지고 사라졌다간 곧 모습을 나타낸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면 키가 쑤우욱 커지고 해가 중천에 떠 있으면 갑자기 작아지기 시작한다.

어릴 적 내가 살았던 고향마을은 북동쪽으로 자리잡아 일찍 해가 뜨고 일찍 해가 저물었다. 마을 뒤에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싸였고 앞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졌으며 동쪽 끝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휘돌아나갔다. 산 그림자가 길게 마을을 드리워 여름은 시원했고 겨울은 흰눈이 쌓여 늘 추웠다. 그래서 이웃 마을사람들은 우리 마을을 '응달마을'이라 불렀다. 해질 무렵, 학교수업이 파하고 마을로 들어서면 길게 드리운 산 그림자 속에 나의 작은 그림자가 묻혀 버려 마치 어머니 품속에 안기는 것처럼 그렇게 포근하고 즐거웠다. 한여름, 대청마루 끝에 앉아 멀리 바라보노라면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푸른 들판에 그림자가 흘러갔다. 이웃마을 양지바른 산발치엔 남향한 집들이 올망졸망 늘어섰고 산기슭에 잠긴 실개천은 나무 그림자 때문인지 푸르고도 푸르렀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골짜기의 응달에 미처 눈이 녹기도 전에, 양달쪽 산비탈에는 파릇한 새싹이 돋아났다. 칠흙 같은 캄캄한 동짓달 그믐 밤, 한적한 동네 골목길은 나를 을씨년스럽게 했고, 휘영청 보름달이 떠오를 때면 달 속 그림자에게 소망을 띄워보기도 했으며, 술레가 되어 아이들과 어울려 그림자를 밟는 놀이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한여름 밤, 달빛아래 멍석을 편 집 뜰에서는 청솔가지로 모깃불을 놓고 큰 부채살로 모기를 쫓으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그림자가 지금도 아련히 비쳐지곤 한다. 그림자는 왜 햐얗지도 않고 빨갛지도 않고 푸르지도 않으면서 항상 깜둥이인지? 그림자는 어디에서 생겨나며 태양에도 그림자가 있는 것인지? 자그마한 개미에게도 그림자가 있거늘 왜 바람은 그림자가 없는 것인지? 끝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곤 했다. 이제는 어릴 적 아름다운 일들이 아련한 추억이 되어 돌아오곤 한다. 요즈음, 불국사의 석가탑이 기울어져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보도를 접하면서,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다. 석가탑을 창건할 때 뛰어난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에 얽힌 슬픈 전설이 떠올랐다. 천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탑이 완성된 후 남편을 만나려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스님의 말대로 온종일 지성으로 빌면서 탑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기를 기다렸지만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르질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친 아사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을 부르며 그만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연못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영영 찾을 수가 없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홀연히 아내의 그림자가 앞산의 바윗돌에 드리워지는 것이 아닌가. 웃는 듯 하다가 사라지고 사라지다간 다시 나타나서 웃는 모습이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 같았다. 아사달은 그 바위에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마친 아사달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나 뒷일은 전해진 바 없다. 훗날 사람들은 이 연못을 영지(影池)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자는 항상 그립다. 그림자는 우리를 즐겁게도 하고 슬프게 하기도 하며 아름답게도 하고 추하게도 한다. 밤하늘에 나타나는 일식과 월식은 태양과 지구와 달 사이에서 빚어내는 신비한 그림자다. 한 점 고려청자 옆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야 참다운 아름다움과 멋이 살아나고, 절벽 위에 홀로 선 소나무도 그림자 없이는 푸르름을 더욱 뽐낼 수 없다. 사람의 명성은 그림자와 같은 것, 명성이 앞설 땐 커지고 뒤따르고 나면 그림자는 작아지는 법이다. "태양이 가장 높이 솟을 때 그림자는 가장 짧다"는 말의 깊은 뜻은 과연 무엇일까? 이제껏 남의 그림자를 짓밟고 다니지는 않았는지. 훔친 고기 덩어리를 입에 문 욕심 많은 허기진 개가 다리 난간에서 냇물 속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면서 마구 짖어대지는 않았는지.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 무렵 늑대가 자기의 그림자가 갑자기 커진 것을 보고 사자 앞에서 자신을 과시한 것처럼 남에게 처신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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