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 청송 진보농협에서 불거진 군납고추 비리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가 한달여 만에 일단락됐지만 아직 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적잖다. 사건해결의 열쇠를 쥔 핵심 3명 중 2명은 죽음을 택했고, 사건의 몸통격인 납품업자 허모(36)씨는 해외로 달아났다.
현재로선 뇌물사슬의 중간고리가 빠져버려 로비자금 상납의 최정점에 누가 있는지 밝히기 쉽지않은 상태다. 군납에 대한 근본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한 제2, 제3의 허씨가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남은 의혹들 속에 숨겨진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아보자.
청송 진보농협에서 운전기사로 근무하던 김모(38)씨가 지난달 30일 음독 자살했다. 그로부터 8일 뒤 원주 원예농협 하나로마트의 판매과장이던 원모(41)씨가 의문의 변시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두 죽음 사이의 연관성을 밝혀내지 못했다.
이들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 음독한 김씨는 숨을 거두기 전 가족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나는 돈(뇌물)을 심부름한 죄 밖에 없다"고 절규했다. 원씨도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기 이틀 전 친구들과 만나 "경찰에 자수해 모든 것을 털어놓고 변호사를 사서 금보석을 신청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던 원씨가 유서는 커녕 가족에게 전화 한 통 없이 숨을 거뒀다. 물론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부검 결과 음독 자살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숨진 원씨의 목에선 깊이 4.5㎝, 폭 2㎝ 크기의 치명적인 칼자국이 발견됐었다.
숨진 두 사람의 공통 분모는 달아난 납품업자 허씨이다. 농협 감사와 경찰 수사 결과 이들 두 사람은 허씨와 밀접한 관계로 오랫동안 '돈 심부름'을 했다는 것. 원씨는 강원도에서, 김씨는 경남.북에서 군 고위 관계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숨진 김씨의 말대로 심부름만 했다면 굳이 이들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납득하기란 쉽지 않다. 경찰의 추정대로 이들은 허씨가 건네는 검은 돈을 받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결국 죽음을 택한 것일까. 그러나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이들을 사지로 몰고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력을 그저 막연하게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납품업자 허씨의 뒤를 봐줬다는 군 고위층은 과연 누구이며, 어느 선까지 군납에 간여한 것인지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경찰 수사를 통해 일부 급양대와 국방부 품질관리소 소속 군인들의 뇌물수수 혐의가 상당 부분 드러났다. 그러나 실제로 안동과 청송지역 고추상인들과 농협 관계자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고추군납 관련 군 주요기관의 실력자는 아직 경찰 수사에선 베일에 싸여있을 뿐이다.
지난 3일 허씨가 인도네시아로 도피할 때 이 실력자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란 소문도 현지에 무성하다. 경찰이 허씨의 해외 출국 사실을 알아낸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란 시간이 흐른 지난 7일이었다.
현지에선 허씨의 비호세력으로 알려진 인물들의 부대와 직책, 계급까지 파다하게 알려져있다. 때문에 경찰 수사결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
안동 일직, 청송 진보, 영양 입암농협 조합장들에게 처음 허씨를 고추 군납업자로 소개한 군내 인사는 누구일까. 또 문제가 된 급양대와 품관소에서 근무한 현역과 예비역, 공무원은 누구의 압력을 받아 허씨를 비호하고 뇌물을 받은 것일까.
이에 대한 조사는 군 수사기관의 몫으로 남았다. 지난 10여년간 고추군납 업자와 거래해 온 지역의 고추상인들은 급양대장선에 머무르고 만 경찰의 수사결과에 코웃음을 치고 있다.
납품업자 허씨는 최근까지 상당량의 저질 고추를 납품해 엄청난 차액을 챙겼고, 거짓으로 꾸민 납품 실적을 이용해 진보농협에서 무려 25억여원을 빼돌렸다. 그가 챙긴 돈의 규모가 수십억원대에 이르지만 이 돈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그간 경찰 수사로 드러난 전.현직 농협직원과 군 관계자들의 뇌물 액수는 모두 합쳐 3억8천46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돈은 어디에 있을까?
군납 리베이트가 600g 1근당 200원이라는 사실은 경북 북부지역 고추상인들 사이에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난해 전국에서 군납된 고추량은 모두 2천754t. 허씨가 납품한 물량만 계산하더라도 리베이트 규모는 수십억원에 이른다.
허씨가 로비과정에서 갖가지 향응을 제공하며 돈을 물쓰듯 했고, 경남 진해에 집을 한 채 사두었다고 해도 최소 수십억원에 이르는 돈의 행방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결국 드러나지 않은 비호세력에게 막대한 자금이 흘러들어갔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다. 지역 상인들은 군납 최고위층에게는 이른바 '사과상자' 단위의 돈이 전달된다고 말한다.
최근 군 모기관은 안동 등 북부지역 고추시장에서 군납 실력자로 거명되는 유력인사들에 대한 혐의 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결과에 대한 귀추가 주목된다.
허씨는 진보농협과 경남 창녕농협, 그리고 관련 군부대에만 로비를 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찰 조사에서 밝혀진 수뢰 혐의자는 진보.창녕농협, 군 관계자뿐이다. 같은 군납 농협인 안동 일직농협과 강원 원주 원예농협, 전남 해보농협에도 허씨가 수집한 저질 고추가 직.간접으로 들어갔지만 지금까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원주 원예농협에서 고추.마늘 등 양념류 군납업무를 맡았던 원 과장이 경찰 수사과정에서 시체로 발견됐는데도 원주지역 사법당국은 단순 변사사건 외에는 아무런 수사도 않고 있다.
연간 40억원 규모의 소채류와 양념류, 과일류를 군납하는 원주 원예농협은 군납비리 사건이 불거지면서 농협중앙회로부터 5일간 특별감사를 받을 예정이었지만 중앙회는 별다른 이유없이 3일간만 감사를 벌이고 철수했다. 중앙회는 감사에서 아무런 비리 사실을 적발하지 못했지만 원 과장은 감사 직후 숨진 채 발견됐다.
아울러 안동 일직농협 조합장 이모(54)씨의 토지를 허씨가 시세보다 3천만원 가량 비싸게 매입한 과정에 대한 의혹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농협이 특정업자의 고추를 군납용으로 수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의문이다. 농협은 농민들로부터 직접 수매해서 군납을 해도 상당한 차익을 볼 수 있었다.
비록 뇌물이 건네지긴 했지만 뻔히 보이는 막대한 수익을 외면한 채 농협이 군납업자를 택한 이유는 단순히 뇌물로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특히 올해의 경우 2등급 건고추 시세는 근당 3천원선으로 무려 4천900여원이 넘는 군납 단가와 비교하면 차액만도 1천900여원에 이른다. 때문에 지역 고추공판장 중매인들은 농협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특정업자의 저질 고추를 받아 군납한 배경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특히 가공공장의 고추 분쇄비용도 군에서 책정해주기 때문에 뇌물을 제외하면 군납에 소요되는 경비라고는 운임 정도가 고작이다. 때문에 고질적인 부실운영에 시달리는 일부 농협들로선 고추 군납의 직거래야말로 경영수지 개선의 지름길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나타나 얼굴도 모르던 허씨의 요구대로 농협 임직원들이 꼼짝없이 군납에 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추상인들은 지난 2000년 2월 농림부가 갑자기 군납 고추에 대한 농산물품질관리원의 국정 검사를 해제하고 군 자체 검사만으로 납품할 수 있도록 조치한데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군 관계자가 내정한 특정업자만이 농협을 통해 군납할 수 있도록 이른바 '정책적 배려'를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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