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입은 비뚤어져도…

정치인에게 요즘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 유권자의 표? 언론? 시민단체? 아니다. 정답은 '벌금 100만원'이다. 그들에게 있어 벌금 100만원은 생과 사(死)의 갈림길, 교도소 담벼락의 이쪽과 저쪽, 야구로 치면 '스트라이크 존'의 표시선이다.

어제 이명규 북구청장은 선거법위반 1심재판에서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아 살았고, 이신학 남구청장은 지난8월 1심서 벌금 500만원이 선고돼 정치생명이 '위독'하다. 현재 16대 국회의원중 선거법위반 사건으로 여의도에서 쫓겨난 의원만도 아홉명(한나라 5 민주당 4)이다. 부패추방이라는 시대의 요구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폼'잡으려면 모두들 '스트라이크 존'안에 들어오라는 것이다.

국내 프로야구가 올해부터 '스트라이크 존'의 상한선을 높여 경기가 훨씬 재밌게 됐다. 야구주심(主審)이 스트라이크를 줄수있는 직사각형 박스의 크기를 종래 '타자의 허리벨트에서 무릎사이'이던 것을 가슴부분으로 15㎝가량 높인 것이다. 프로야구 초창기엔 '투고타저' 즉투수들은 강하고 방망이가 시원찮아서 '스트라이크 존'을 좁혀 놓았었는데, 요즘은 거꾸로 '타고투저'-투수들이 영 시원찮아 구경하는 재미가 떨어지자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스트라이크 존을 조금 넓히기로 한 것이 그간의 속사정이다.

정치인들에게 있어 '벌금 100만원'은 그래서 프로야구의 '스트라이크 존'이 돼버렸다. 이 스트라이크 박스가 그렇게 작은것이 아닌데도 삼진아웃 당하시는 분들이 무더기로 생기는 것을 보면 우리 정치인들, 상류계층의 '모럴 박스'가 이 '스트라이크 박스'보다 훨씬 더 크다, 즉 법과 도덕에 대한 기본의식이 너무 물러터져 있음을 읽게 되는 것이다.

수십년동안 정당하지 못한 정권, 고생만해온 정권들이 생기다보니 목에 때벗기듯, 만수산 드렁칡이 얽히듯 해왔고 그래서 모두들 부패에 둔감해지고, 부패를 윤활유처럼 생각해 온 것이 저간의 공감대였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시민의식이 급속히 업그레이드 되고있는 이 상황변화에서 우리 모두 '스트라이크 존'이 좁다고 한탄할 때가 아님을제대로 읽어야 한다. 불법과 부패의 둔감증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법과 도덕에 대한 기본의식이 너무 물러 터져있다는 사례, '스트라이크 존'이 좁다고 불평하는 사례는 바로 한두달 전의 국회청문회장에 나왔던 국무총리 세 후보와 문희갑 전 대구시장의 경우에서도 읽혀지고, 그것은 곧 우리 공직사회가 나아갈 바에 '학습모델'이 될 법하다.

그때 장상 후보는학력오기·아파트 불법개조·부동산투기 의혹에서 스스로 흔쾌히 정리하지 못했고, 장대환 후보도 소득세및 토지증여세 탈루의혹에서 헤어나지 못한채 무조건 잘봐달라 머리만 조아리다 탈락했다. 겨우 막차탄 김석수 총리도 6억원정도의 편법증여에 대한 증여세 탈루 추궁에 백기(白旗)를 들었다. 첫 시도된 총리청문회제도는 총리를 하려면 대학총장보다, 언론사 사장보다 더한 도덕성과 국가관이 있어야 함을 '이제서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놓친 것이 있다. 총리청문회에서 제기되고 밝혀진 후보들의 '의혹들' 이 총리에서 떨어졌다고 덮어지고, 총리가 됐다고덮어진다면 이 또한 공평한 법의 잣대가 아니다. 실로 이 땅에서 '청렴'을 얘기하기란 쉽지않다. 누구든 조금씩은 부패의 때가, 최소한 불의(不義)에 대한 묵인의 과오라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장대환 후보가 국민앞에 스스로 시인하고 사과한 토지증여세 탈루부분에 대해 국세청이 눈감으면 그만인가? 청문회가 끝났으면 다인가? 김석수 총리가 자녀들에게 재산편법증여를 시인하고 "증여세를 낼 용의까지 있다"고 밝혔음에도 후속조치가 없다면월급쟁이들만 불쌍하지 않겠는가. 부패에 몸서리 난 국민들은 지금 공직자들에 대한 법의 잣대가 끝까지 휘지 않기를 요구하고 있다.

다시,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문희갑 전 대구시장의 경우도 그렇다. 뇌물수수 관련 검찰수사에서 밝혀진 바, 지난 90년 대구 서갑 보선때 쓰고 남은 정치자금으로 알려진 12억여원의 향후처리에 시민들의 궁금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문씨 측근들의 차명계좌에 입금된 이돈이 '이후 정치권에 유입된 흔적이 없고, 정치자금법상 공소시효도 끝났다'고 밝혀, 이돈에 대한 법적 책임은 없다. 그러나 대구시민에 대한 '도덕적인 빚'은 그대로 남는다. 도대체 정호용·백승홍 후보와 맞붙었던 그 'TK목장의 결투'때 여당의 선거자금이 얼마나 됐길래 그만큼이나 남았으며,"그럼 지금 그돈은 누구 소유냐"하는 대목에서 시민들의 눈길은 멈춰서 있다.

최근 서울대 홍두승 교수가 대학생 1천700여명을 상대로 한 의식조사에서 무려 56%가 "해외에 있을때 전쟁나면 귀국하지 않겠다"고 답변했다. 이땅의 상류계층·기득권층의 도덕성·윤리의식의 점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보면 정치·경제·사회적 '스트라이크 존'은 프로야구완 달리 좀더 좁혀져야 할 것 같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일 뿐'이다.

강건태(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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