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1월 3일 김대중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지방 발전의 획을 그을만한 선언을 했다.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3개년 계획으로 대통령 직속의 기획단을 설치하고 대기업 본사 지방 이전과 지방교육 특성화 등 75개 개혁과제를 실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사항 중 이행은 고사하고 진행중인 정책 또한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김영삼 정부 역시 정권 초기 강력한 의지로 비슷한 내용의 균형 발전안을 제시했지만 역시 발표로만 그쳤다. 두 전직 대통령 모두 영·호남이라는 지역적 기반을 근거로 정권을 인수했지만 이들의 집권 기간 동안 나타난 결과는 철저한 지방 외면과 수도권 비대화의 가속이었다.
다시 대선을 60일 앞둔 현재. 각 후보들은 해묵은 지역 발전 공약을 '특효약' 처럼 들고 다니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여기에 맞춰 수도권을 뺀 각 지방민들은 '우리 지역이 가장 낙후됐다'는 식으로 지역주의에 근거한 '특혜성 공약'을 요구하고 있다. 역대 선거에서 새로운 중앙정치권력의 탄생을 위해 '지역 감정'이라는 뼈아픈 상처만 떠안은 지역민들이 다시 중앙 정치 권력의 들러리 역할로 나서는 악순환을 되풀이한 셈이다.
홍덕률 교수(대구대 사회학)는 이러한 지역주의나 지역감정을 두고 '머슴들의 싸움'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지방이 자생력이 없고 일방적인 수혜의 입장에 있다보니 중앙권력이 주는 것을 누가 더 많이 받는가라는 감정싸움을 벌이고 있다"며 "지방 분권이 시행되지 않는 한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지 정도 차이만 있을뿐 지방은 소외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홍 교수는 "지역감정은 결국 수도권 정치집단의 선거전략이며 지역이 자생적인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지 않는 한 선거때마다 '우리지역 발전만'을 외치는 지역감정은 사라질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호남에서 지방분권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민원 교수(광주대 경영학과)는 영·호남 갈등은 두지역 출신 서울 사람들의 갈등이라고 표현한다. 이 교수는 정치권을 빗대 "애향심 차원에서 지역기업의 물건만 열심히 사주었더니, 독점기업이 되어 질 낮고 값비싼 물건만을 공급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며 "특정 정치권력에 대한 지역민의 맹목적 지지의 결과는 중앙권력 강화로 이어져 왔다"고 지적했다.
각 지역의 학계·시민단체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지방분권 운동은 이런 맥락에서 지방을 살리고 퇴행적인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21세기 국가전략으로 지방 분권·분산 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또 이번 대선을 통해 영·호남을 비롯한 지방이 지역감정의 골을 넘어서 '함께 살 수 있는 방안'인 지방분권 운동에 적극 나설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대 정권에서의 경험에서 보듯 지방분권의 전망이 장밋빛 만은 아니다.부총리와 한국개발연구원장을 지낸 김만제 의원은 "권력의 속성상 누가 집권을 하든지 지방분권을 실천하기는 어렵다"며 "집권층이 된 사람들이 권력의 맛을 알고 나면 손에 쥔 권한을 내놓기가 어려워진다"고 밝혔다.
국회에서 1년째 잠자고 있는 지방균형발전법안을 주도하고 있는 김 의원은 "어떤 강제력이 없으면 지방분권이 실현되기가 힘들지만 지방 출신 의원들조차 상당수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결국 지방민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뭉쳐 한 목소리를 내는 실천 의지를 보이지 않는한 '지방 분권'은 요원한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재협기자 ljh2000@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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